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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Dec 27. 2022

1394(태조 3년) 왕씨의 성을 쓰지 못하게 하다

고려 왕조에서 왕씨(王氏)로 사성(賜姓임금이 내려준 성)이 된 사람에게는 모두 본성(本姓)을 따르게 하고, 무릇 왕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또한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게 하였다. - 태조실록 5권     

이성계는 1394년 고려 왕족임을 나타내는 왕씨 성을 사용하지 말라는 왕명을 내려요. 왜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요? 여기에는 이성계의 자신이 세운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절박함이 담겨있어요. 보통 우리는 518년 동안 존속했던 조선의 모습만 떠올리며, 백성들이 조선 건국을 환영하며 좋아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어요. 오히려 정반대의 모습을 더 많이 보였어요. 


이성계는 공양왕에게 왕위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왕으로 즉위했어요. 이것은 백성에게 역성혁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여,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일종의 정치 쇼였어요. 하지만 공양왕이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왕위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비록 지금은 역적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무너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이 멸망하고 고려가 돌아올 것이라 많은 이들이 믿었어요. 함경도 촌구석에서 올라온 이성계가 전쟁은 잘하지만, 국정을 운영할 능력은 부족하다고 봤거든요. 또한 정도전을 비롯한 급진사대부들도 의욕만 강하지, 나라를 운영할 경험과 연륜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고려 왕조의 부활을 바라는 백성들의 바람이 허황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475년간 지속되어온 고려의 역사는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었어요. 당시 사람들에게 고려가 아닌 다른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사람마다 조선이 곧 무너지고, 고려가 다시 설 거라고 수군덕거렸어요. 심지어 하늘이 왕을 죽인 이성계에게 천벌을 내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런 민심을 이성계도 모르지 않았어요. 고려에 충성을 맹세하는 신하들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고, 백성들이 모여서 자신을 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이런 움직임은 역사에도 그대로 남아있어요.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볼까요. 우선 두문동 72현이 있어요. 순조 때 기록된 『두문동실기』에 따르면 조선 건국을 인정할 수 없었던 조의생, 맹호성 등 72명의 고려 관료들이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에 있던 두문동에 들어가 은둔했다고 해요. 이성계는 조정에 나와 일하라고 여러 번 권유하지만, 이들은 조선 왕조를 받들 수 없다며 왕명을 계속 거부했어요. 결국 이성계는 이들로 인해 민심이 동조할까 두려워 모두 불살라 죽여버려요. 여기서 집 밖에 나가지 않는 행동을 일컫는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두문동 72현이 조선 건국에 대한 고려 관료들의 반발이라면, 조랭이떡 이야기는 백성들의 고려에 대한 충심을 보여줘요. 조랭이떡은 눈사람처럼 생긴 귀여운 모습이지만, 이 떡의 유래에는 듣기만 해도 섬뜩한 이야기가 담겨있어요. 조선이 건국되고 수도가 한양으로 옮겨지면서, 개성에 살던 사람들은 큰 피해를 보았어요. 그동안 수도에 살면서 누렸던 많은 특권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거든요. 특히 누구보다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던 이들은 이성계의 목을 조르는 형상의 조랭이떡을 만들며 복수를 다짐했어요. 기필코 이성계를 죽여 고려 왕조를 다시 일으키겠다고요. 

이처럼 관료들과 백성들의 반발이 일어난 실질적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볼까요. 우선은 기득권이 누리던 특권이 사라졌다는 데 있어요. 이성계는 위화도회군 이후 전제개혁토지개혁을 했어요. 이것을 과전법이라고 해요. 과전법을 성공시키기 위해 이성계는 불법적으로 약탈당하였거나 누락된 토지를 찾아내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그동안 막대한 이익을 챙기던 권문세족고려 후기 지배계층 등 기득권 세력으로서는 당연히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미웠겠죠. 또한 사람들은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커요. 많은 것을 한꺼번에 바꾸기보다는 잘못된 것을 점진적으로 개선되기를 바라죠. 그런데 조선은 천년 가까이 민중의 삶에 영향을 미치던 불교를 탄압했어요. 그리고는 생소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성리학에 따른 삶을 백성에게 요구했어요. 그 결과 부처님에게 복을 기원하지 못하게 하고, 남녀 간의 자유로운 연애도 하지 못하게 막는 조선의 국정 운영을 백성은 이해하지 못했어요. 더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고려를 그리워하는 백성도 있었어요. 


민심이 고려를 그리워하며 회귀를 바라는 만큼, 이성계는 국정 운영에 여러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어요. 조선에 대한 거부감이 생각에서 끝나지 않고, 실제 역모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어요. 결국 이성계는 고려의 부흥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구심점을 제공하는고려 왕족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해요. 우선 고려 왕족을 거제도와 강화도 등 섬으로 유배 보내는 과정에서 물에 빠뜨려 죽였어요. 당연히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과 그의 두 아들도 살해했죠.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이성계는 이 세상에 왕씨 성을 아예 없애버리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왕씨 성을 가진 수많은 사람을 모두 죽일 수는 없어서 왕씨 성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어요. 그 결과 왕씨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성을 바꿨어요. 왕(王)에 간단하게 점을 찍거나 덧붙이는 방식으로 옥(玉), 주(主), 전(全) 등으로 바꿨어요. 이것은 자신들이 왕씨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한 나름의 강구책이었어요. 더러는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박씨나 이씨로 바꾸기도 했어요. 


왕씨를 사용해도 처벌받지 않게 된 것은 태종 이후부터예요. 국가의 토대가 단단해졌다고 자신한 태종은 “만약 이씨가 도(道)가 있다면, 비록 백 명의 왕씨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도 능히 우환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왕씨가 아니라 할지라도 천명을 받아 대대로 흥하는 자가 없겠느냐.”라며 왕씨의 후예를 발견해도 처벌하지 말라고 명령했어요. 그러나 이미 왕씨를 사용하는 사람은 대부분 사라진 상황이었어요. 그 결과 왕씨를 사용하는 사람은 2015년 통계청에 따르면 25,565명에 불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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