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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an 03. 2023

정도전의 요동정벌 추진

정도전과 남은이 조준의 집에 나아가서 말하였다.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일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준이 말하였다.

"내가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반열(班列)에 있는데 어찌 전하(殿下)를 저버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로 국도(國都)를 옮겨 궁궐을 창건한 이유로써 백성이 토목(土木)의 역사에 시달려 인애(仁愛)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원망이 극도에 이르고, 군량(軍糧)이 넉넉지 못하니, 어찌 그 원망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능히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습니까?" - 태조실록 14권     

이성계는 요동을 정벌하라는 우왕과 최영의 명령에 맞서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여름철에 전쟁하면 일 년 농사를 망친다. 왜구의 침입이 늘어날 것이다. 장마철에는 활을 붙인 아교가 떨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으로 희생될 것이다.”라며 4불가론을 제시했어요. 이것은 위화도회군의 명분이 되어 조선 건국의 발판이 돼요. 그런데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나서 요동 정벌을 추진해요. 왜 그는 스스로가 반대하던 요동 정벌을 재추진했던 것일까요?


건국부터 명나라에 즉위 승인과 국호를 내려받는 의식을 통해 친명 정책을 펼치며, 조선은 대외정책에서 안정을 추구했어요. 오랜 전란으로 피폐화된 삶을 복구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우선 과제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조선의 의도와는 달리 명나라는 끊임없이 조선을 경계하며 괴롭혔어요. 여기에는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의 군사 강국이었다는 사실이 바탕에 깔려있어요. 고구려가 수와 당나라의 공격을 이겨냈고, 고려는 거란과 맞서 싸워 승리하고, 몽골의 침략을 40년 동안 막아냈으니까요. 그런데다 조선의 국왕이 동아시아 최강의 무인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수도 없이 토벌한 명장 출신이라는 사실이 신흥국이던 명나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어요. 


그런 가운데 태조 1년(1392) 사은사로 온 정도전이 조선과 명의 관계가 잘 풀리지 않으면 군대를 끌고 침략하겠다는 말을 명나라가 듣게 돼요. 이것이 빈말이 아니라는 듯 조선은 삼군총제부를 의흥삼군부로 개혁하고 중방을 혁파하는 등 군제 개편을 연이어 단행했어요. 이 과정에서 정도전은 판삼사사와 판의흥삼군부사를 겸임하여 군정 개혁과 군비 강화를 추진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여진족이 조선에 귀화하고 조선 해적이 중국 본토를 약탈하자, 명나라는 조선이 요동을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확신했어요. 


명태조실록에 요동은 군량이 모자라 군사들이 굶주리고 있어 조선이 20만 군으로 쳐들어오면 어떻게 대응하겠냐며 탄식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어요. 이것은 명나라 태조가 말로만 조선을 정벌하겠다며 큰소리 낼 뿐, 실질적으로 조선을 정벌할 여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줘요. 그래서 표전중국 황제에게 바치는 외교문서문제를 통해 요동 정벌의 중심에 있는 정도전을 잡아들여 조선의 요동 정벌을 무산시키고자 했어요. 


명 태조는 빈농 출신으로 탁발승이 되었다가 도적 떼인 홍건적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승려의 민머리를 표현하는 「光」, 승려 「僧」 뿐만이 아니라 도적을 의미하는 「賊」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어요. 심지어 발음이 비슷한 한자도요. 만약 사람들이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서슴없이 처형했어요. 이것을 문자 옥이라 불러요. 명 태조는 조선을 길들이는데도 문자 옥을 사용하고자 했어요. 

태조 4년(1395) 표문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문구가 있다면서, 표문을 작성한 책임자로 정도전을 보내라고 명령했어요. 이성계는 병을 핑계 삼아 명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러자 그해 11월 왕의 고명과 인신을 요청하는 주청문이 무례하다며 다시 한번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했어요. 이때에도 이성계는 권근과 정탁 등을 명나라에 보내면서도, 정도전은 제외해 보호했어요. 이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요동 정벌에 성공하겠다는 이성계의 의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어요.


이성계와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계획한 것은 대외적으로 명나라의 무리한 조선 길들이기에 대한 반발이 깔려있어요. 대내적으로는 사병을 혁파하여 왕권을 안정화하는 데 목적이 있어요. 5년간의 준비로 자신감을 얻은 정도전은 태조 6년(1397) 요동 정벌계획을 발표하며 강력하게 추진해요. 하지만, 고려와 마찬가지로 실패로 끝나고 말아요. 실패 원인은 명나라 태조의 죽음에 있어요. 명나라는 명 태조가 죽자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버리고 유화책으로 노선을 변경했으니까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실패 원인은 정도전의 죽음이 있어요. 조준을 비롯하여 이방원을 지지하던 관료들은 군량 부족과 민심 불안 그리고 군사훈련 부족을 내세워 요동 정벌을 반대했어요. 그럼에도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계속 추진하자 태조 7년(1398) 8월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해요. 이 과정에서 방석과 방번 두 아들을 잃으며 충격을 받은 태조가 둘째 아들 이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요동 정벌은 무산되게 돼요. 요동 정벌을 반대하여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추진하다 왕위를 넘겨주는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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