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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Feb 08. 2023

뒤틀린 부자 관계1/2

흥선대원군 : 제가 전하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아십니까? 세간 사람들에게 ‘상갓집 개’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참았고, 아들을 왕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에 아버지 묘를 이장했으며, 영종도의 용궁사에 있는 옥부처에게 전하를 왕이 되게 해달라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전하께서 왕이 되신 이후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왕권을 갖게 해드리려고 온갖 궂은일은 제가 다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그런 저를 이렇게 내치실 수 있습니까?     


고종 : 아버님 진정 저를 위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 모두가 아버지 자신을 위해 벌인 일이었습니다. 왕의 권위를 바로 세워주겠다고 하셨지만, 정작 저를 가장 무시한 것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아버지 당신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아버지의 방식으로는 조선을 이끌 수 없습니다. 빠르게 변화되는 세상에 맞추어 우리도 변해야 합니다. 이제는 저와 민비를 믿고, 남은 삶은 여행이나 다니면서 편안하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왕권강화만이 나라가 살길이다.

19세기 세도정치 아래 최고 권력을 지닌 안동김씨는 능력 있는 왕족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를 왕으로 즉위시키거나, 정치에는 문외한 청년을 꼭두각시 왕으로 내세워 권력을 농단했습니다. 자신들의 행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뚝심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왕족은 역모죄로 죽이거나 멀리 유배를 보내버렸습니다. 흥선대원군(1820~1898)도 안동김씨에게 여러 차례 봉변을 당하며 곤욕을 치렀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흥선대원군은 젊은 시절 송시열을 모시는 화양서원 앞을 불경스럽게 나귀를 타고 지나갔다는 이유로 유생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왕족이라고 유생에게 밝혔지만, “어쩌라고”라는 답변과 함께 주먹과 발길질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매를 맞으면서 이 세상이 잘못 돌아가도 단단히 잘못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는 순간 해코지를 당할 것을 우려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춰버렸습니다. 이후 ‘상갓집의 개’라고 불릴 정도로 권세가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고, 심복들을 데리고 건달처럼 생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최고의 권력자가 되려는 방법으로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우선 충청남도 예산 가야사라는 사찰 자리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수 있는 명당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전 재산을 사용하여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의 형제들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장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호통을 쳤습니다. 다른 형제 모두가 깊이 두려워하며 그만두자고 하자, 흥선대원군은 얼마나 이 땅이 좋으면 꿈에 노인이 나왔겠냐며 웃었다고 합니다.


인천 영종도에 있는 백운사에는 바다에서 그물에 걸려 올려진 옥부처옥으로 만들어진 부처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얼마나 옥부처의 영험이 컸는지 사람들이 말이나 소를 타고 백운사 앞을 지나가려고 하면, 말과 소가 꼼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흥선대원군은 사찰 이름을 용궁사로 바꾸고 이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아들이 왕에 즉위할 수 있도록 부처님에게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철종이 죽자, 흥선대원군은 부리나케 조대비를 찾아갔습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아내이자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지만, 안동김씨의 등쌀에 숨죽여 지내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이 일찍 죽은 원인이 안동김씨에게 있다고 생각한 조대비는 조정에서 안동김씨를 몰아내야 한다는데 흥선대원군과 뜻을 같이했습니다. 그 결과 조대비는 철종이 후사 없이 죽으면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다음 왕위계승자로 지목하기로 약속했었습니다. 그래도 조대비가 다른 왕족을 다음 왕으로 지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궁궐로 달려간 흥선대원군은 안심해도 된다는 조대비의 눈짓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안동김씨도 조대비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의 평소 행실과 명복이 12살에 불과한 어린아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자신들의 뜻대로 정국을 운영할 수 있겠다는 생각했습니다.     


왕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안동김씨는 자신들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조선 시대 유일한 살아있는 대원군이 된 흥선대원군은 기존의 방탕했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했습니다. 나라의 근간을 뒤흔든 문제를 바로 잡는 것이 고종과 조선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 흥선대원군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우선 안동김씨의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그동안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던 세력을 과감히 등용했습니다. 그리고 비변사를 통해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관행을 막기 위해 의정부와 삼군부에 정치와 군사 업무를 분배하여 권력을 분산시켰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개인의 결정이 아닌 공식적인 법률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신료와 백성에게 보여주기 위해 『대전회통』조선 마지막 법전도 편찬하였습니다. 

또한 세도가의 오랜 수탈로 피폐해진 백성의 삶을 살피면서도, 텅텅 빈 국가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였던 환곡제의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해 사창제를 시행하였습니다. 환곡제란 가난하여 가족을 돌보기 힘든 백성을 위해 국가가 곡식을 내어주는 구휼정책인데 19세기 일부 수령은 공권력을 이용하여 사적이익을 얻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을 공권력이 없는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사창제로 대체하여 문제 소지를 없애고자 했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원에서 공부한다는 이유로 군포를 내지 않는 양반의 횡포를 막기 위해 서원철폐와 호포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전국 600여 개의 서원을 47개로 줄이자, 국가에서 서원에 지급하던 막대한 재원이 비축되었습니다. 서원을 핑계로 군포를 내지 않던 양반에게 인정(人丁)이 아닌 가호(家戶)로 기준으로 군포를 거둬들이는 호포제를 실시하자 국고가 빠른 속도로 채워졌습니다. 백성들 또한 조세의 형평성이 맞춰진다는 사실에 기뻐했습니다. 이 외에도 흥선대원군은 양반과 토호들이 숨겨놓았던 토지(은결)을 찾아내는 등 국가 기강을 바로잡자, 그동안 삼정의 문란이라 불리던 많은 적폐가 점차 해결되어 갔습니다. 


그 결과 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이 침략한 신미양요를 맞아 백성들은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내쫓을 수 있었습니다. 주변국인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하고, 일본이 미국에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한 것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기반에는 흥선대원군 덕분에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백성들의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의 통상수교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심을 백성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세도가 축출과 삼정의 문란 개선 그리고 서양 세력의 통상수교 거부 모두가 고종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종도 아버지의 노고를 인정하고 고맙게 여길 것이라 자신했습니다.     


---다음 내용은 <조선에서 가장 왕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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