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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Feb 14. 2023

뒤틀린 부자 관계 2/2

조선에서 가장 왕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1863년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한 고종은 모든 것이 두렵기만 했습니다. 나라의 임금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너무도 어린아이였습니다. 따뜻한 말과 위로를 해줄 어머니조차 없는 궁궐은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운 공간일 뿐이었습니다. 궁궐에서 마주할 수 있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따뜻하게 안아주기보다는 늘 엄중한 자세로 왕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가르치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늘 근엄한 자세로 자신을 대신하여 신하들과 나라의 모든 일을 결정하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고종은 숨을 쉬기 어려웠습니다.


고종이 빨리 원자를 생산해야 한다고 생각한 흥선대원군은 아내의 먼 친척인 여흥 민씨 집안의 어린 소녀를 며느릿감으로 선택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서 외척으로 성장할 배경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는 아내와 같은 여흥 민씨 집안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린 소녀에게 왕비와 며느리로서 행동해야 할 규범을 가르친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서 고종과의 가례를 진행했습니다. 이 어린 소녀가 훗날 명성황후가 됩니다.


왕의 가례가 궁궐이 아닌 흥선대원군의 집인 운현궁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에 고종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가례가 끝나고 궁궐 주변을 행차하는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뒤에서 사람들의 인사를 받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조선의 왕이 맞는지 의심되기까지 했습니다. 명성황후도 남편과 자신을 왕과 왕후로 인정하지 않고 사사건건 가르치려 드는 흥선대원군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흥선대원군이 고종과 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습니다. 명성황후도 가례를 올린 지 5년 만에 아이를 낳았지만, 안타깝게도 항문이 없이 태어나 5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명성황후는 아기 몸에 칼을 대는 수술을 할 수 없다고 반대한 흥선대원군을 원망했습니다. 1880년 완화군이 13살에 일찍 죽자,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의심하면서 둘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지고 맙니다.     


제가 왕입니다더는 관여치 마십시오.

성인이 된 고종은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어린 10대에는 흥선대원군의 행보에 감히 비판조차 할 수 없었고, 모든 것이 고종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자신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흥선대원군에게서 독립해야만 진정한 조선의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정책이 정말 올바른 일인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마침 서원철폐를 비롯한 흥선대원군의 여러 정책을 비판하며, 고종이 직접 정치해야 한다는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경복궁 중건 당시에도 원납전 징수와 당백전 발행으로 백성이 고통을 당한다며 중지를 당당하게 외치며 많은 유생의 지지를 받던 최익현(1833~1906)이 올린 상소는 고종에게 친정의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에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반감을 갖던 개화파들도 고종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흥선대원군은 집권 10년 만에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우선 고위 관료를 교체했습니다. 이때 개화를 주장하던 박규수 우의정에 임명했습니다. 또한 고종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삼군부를 약화하고 무위소를 설치한 뒤, 고종의 사람을 책임자로 앉혔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부터 궁궐에서 생활한 고종이 조정에서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능력 있는 인재를 말입니다. 결국 인재 수급에 어려움을 겪은 고종은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명성황후의 친인척을 중용했습니다. 그동안 소외당했던 능력 있는 인물이 등용되기도 했지만, 서울 민영주, 강원 민두호, 경상 민형식처럼 백성에게 ‘세 도둑’이라 불리며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민씨 척족들도 많이 임용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고종은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했던 정책 중 대내적인 것은 왕권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많아 크게 변경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통상수교거부정책은 변화가 시급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 당시 조선은 청으로부터 해국도지와 영환지략 등 서양 문물과 국제 정세를 다룬 서적의 보급으로 개화에 대한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주변국인 청이 영국에 의해 강제로 문호 개방하고, 일본이 미국의 위협에 굴복하여 수교를 맺은 만큼, 조선도 더는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를 끊임없이 주장하던 박규수를 우의정에 앉히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외정책을 바꾸는 큰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인재와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본이 군함 운요호로 조선을 위협하며 통상수교를 요구하자, 고종과 조정은 제대로 된 준비 없이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서둘러 맺었습니다. 강화도조약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기록되기도 하지만, 불평등한 조약으로도 기억되는 만큼 조선은 이후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무엇보다 개항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서구 문물을 수용한 결과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있던 흥선대원군과 고종·명성황후와의 갈등이 다시 수면 밖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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