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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Feb 21. 2023

왕도 함부로 먹지 못한 귀한 포도

현재 우리가 먹는 포도는 서아시아 종군에 속하는 유럽 종이다. 서아시아 지방에서 기원전 4000년경 포도주를 만드는 양조장이 발견되었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알려주는 ‘길가메시 서사시’에 포도로 만든 음료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이 포도를 재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포도와 포도주는 국가 간 주요 무역품으로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이 되기도 하였다.      


기원전 1750년 만들어진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에 포도주를 무역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이집트에서는 신에게 기도드릴 때 포도주를 사용했다. 이후 서아시아의 포도는 문명의 흐름을 타고 유럽의 그리스, 로마로 전파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으로 확대 재배되었다. 특히 기독교에서 포도주를 신의 선물로 인식하면서, 유럽의 일상생활에서 포도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과일이 되었다.      

서아시아 종군의 포도가 유럽으로만 전파된 것은 아니었다. 한나라 무제 때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으로 인해 중국으로도 전파되었다. 한나라 무제는 흉노족을 정벌하기 위해 장건을 중앙아시아에 있는 대월지로 보내 협공을 요청했다. 13년 동안 장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월지의 협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장건은 중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포도를 중국으로 들여왔다.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의 대원열전을 보면 ‘중앙아시아 동부에 위치하였던 대원이라는 지역에서는 포도로 술을 담그고, 부자들이 포도로 술을 담가둔 것이 만석에 이른다. 오래되어도 술맛이 변하지 않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서아시아에서 오래도록 재배되던 포도가 장건이 개척한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그래서 포도라는 이름이 이란에서 포도를 부르는 ‘부다우(Budaw)’를 중국어로 음역한 데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서아시아 종군의 포도가 들어온 시기를 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산둥 지역에 있던 북위의 북양태수 가사협이 6세기 전반에 저술한 농서 《제민요술》에 포도 재배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제민요술》이 백제와 신라에 전해졌고, 신라에서는 포도 문양을 넣은 와당이 발견된 것을 토대로 우리나라에 서아시아 종군의 포도가 들어온 시기를 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재배까지 성공하지는 못하고 주로 포도 열매나 포도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포도 재배는 성공하지 못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고려 충렬왕은 1298년, 1302년, 1308년 원나라 황제에게 포도주를 선물받았다. 1324년 원나라 과거 시험에 합격한 안축(1282~1348)은 투루판 사람에게 포도주를 선물받은 답례로 시를 지었고, 이색(1328~1396)은 포도주를 마신 일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도 포도는 매우 귀한 과일로 대접받았지만, 포도가 빨리 상하는 과일인 만큼 왕조차도 신선한 포도를 먹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이 건국하고 나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포도는 왕도 쉽게 먹을 수 없는 매우 귀한 과일이었다. 오죽하면 태조 이성계가 포도를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조순을 시켜 세자와 여러 왕자들에게 포도를 구해오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태조가 자식들에게 포도를 구해와야 할 이유로 든 이야기가 참으로 재미있다. 태조 자신은 아버지가 보고 싶어도 이미 돌아가셔서 마음으로 그리워할 뿐인데, 세자와 왕자들은 태조 본인이 아프기는 해도 살아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포도를 꼭 구해와야 한다고 말한다. 즉 태조 자신이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도록 수정 포도를 구해오라는 반협박성 강요였다. 이때의 수정 포도는 ‘흰빛이 나는 포도’라는 뜻으로 지금의 청포도로 추정된다.      


아픈 부모가 포도를 먹고 싶다는 말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태조의 자식들은 모두 울면서 상림원사 한간을 찾아가 포도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왕자들이 포도를 찾는 데 모두 나섰다는 말을 들은 김정준이 서리를 맞아 반쯤 익은 산포도 한 상자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태조는 아직 덜 익어 맛도 없었을 포도임에도 너무도 크게 기뻐하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한간이 제대로 익은 수정 포도를 구해오자, 태조는 쌀 10석을 내려주며 칭찬하였다. 태조는 수정 포도를 한번에 모두 먹기가 아까웠는지 목이 마를 적에만 1~2개씩 맛보며 아껴 먹었다. 너무도 먹고 싶은 포도를 먹어서 일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는 포도를 먹고 나서 앓던 병이 나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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