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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Feb 28. 2023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까닭

일연 스님(1206~1289)은 고려 시대의 격동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일연 스님은 9살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신정변 이후 끊임없이 일어나는 권력투쟁으로 희생되는 수많은 민초들의 고충을 보고 들으면서 부처님 뜻과 다른 세상을 마주하였다. 일연 스님은 도탄에 빠진 백성을 돕기 위해 자신에 대한 수련과 공부에 게을리 않고 매진하였다. 그 결과 22세에 선종 승과에 합격하여 더욱 많은 백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공감해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일연 스님이 26세가 되던 1231년 몽골군이 쳐들어왔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큰소리치던 무신정권이 원나라 군대를 피해 강화도로 도망가자, 백성들은 굶주려 죽거나 몽골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일연 스님이 민초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다독여주는 일밖에 없었다. 특별하다고 말할 수 없는 당연한 일들이었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하지 못하던 일이었기에 매우 돋보이는 행동이었다.      


원 침략기 불교계는 종교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권력자의 대변인이자 하수인 역할을 하는 승려와 사찰이 많았다. 일부 승려는 권력과 돈을 가진 귀족들만을 상대하며 재물을 모았다. 더러는 사찰에 소속된 노비들이 만든 수공업품을 팔아 이익을 취하거나 고리대금으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았다. 여기다가 원나라에 빌붙는 매국적인 승려들도 나오는 상황이었으니, 옳은 길을 묵묵히 나가는 일연 스님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따르는 사람도 많아졌다.      


일연 스님의 개인적인 명성은 날로 높아져 1283년에 국존에 책봉되었지만, 올바른 역사를 저술하겠다는 젊은 시절의 꿈을 놓지 못하였다. 일연 스님은 개인의 영달만을 좇는 세태 속에서 고려가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주적인 역사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있었지만, 유교적 사관에 맞추어 중국을 상국으로 여기고 우리를 제후국으로 생각하는 한계에 답답함을 느꼈다. 또한 불교계에도 옛 고승들의 불도와 호국정신이 알려져 개혁과 쇄신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일연 스님은 노년에 쉬지 않고 저술한 결과 《삼국유사》를 완성하게 되었다. 구성을 살펴보면 전체 5권 2책으로 제1권은 왕력(王歷)·기이(紀異), 제2권은 기이(紀異), 제3권은 흥법(興法)·탑상(塔像), 제4권 의해(義解), 제5권 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왕력과 기이 편이 전체의 절반 이상으로, 그동안 다루어지지 않았던 우리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왕력에서는 고조선에서 후삼국까지의 역사를 다루면서, 가야의 역사도 포함했다. 기이 편에서는 정사에서 다루지 않던 전설 등을 담아두면서, 잊힐 수 있었던 일들을 오늘날에 전하고 있다. 그 외에도 흥법·탑상·의해 편에서는 불교의 전래와 불교와 관련된 조형물 그리고 뛰어난 고승의 이야기를 기록해두었다.      


《삼국유사》는 불교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자주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는 몽골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민족정신이 담겨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타락해가던 불교계에도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원 간섭기에는 일연 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의 의도가 잘 전달되지 못했지만, 후대에 우리의 역사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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