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호 Mar 07. 2023

김옥균과 홍종우

청의 내정 간섭이 시작되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의 질 좋은 곡물을 마구 사서 자기네 나라로 가져갔어요. 땅을 가진 조선의 양반과 지주 계층은 곡물을 팔아 떼돈을 벌었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농민들은 곡물이 부족해진 바람에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기 일쑤였죠. 개항하면 장밋빛 미래가 찾아올 줄 알았는데…. 웬걸요. 백성들의 삶은 궁핍해져만 갔습니다. 


그 와중에 조선 왕실은 국방력을 강화하겠다며 많은 세금을 들여 신식 군대 별기군을 창설했어요. 가뜩이나 부족한 나라 살림에 무리해서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으니, 기존 군인들에게 월급이 제대로 지급됐을 리가 없죠. 조선의 기존 군대였던 훈련도감의 군인들은 급료를 몇 달씩 늦게 지급받거나 급료의 반만 받는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근무를 이어 갔답니다.


그러던 중, 구식 군인들을 분노케 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아요. 1882년 6월, 13개월 밀린 급료 중 1개월분을 지급한다는 소문을 듣고 훈련도감 군인들은 관청을 찾았어요.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겨와 모래가 잔뜩 섞인 쌀이 전부였죠. 분노가 폭발한 군인들은 군 책임자 민겸호의 저택을 부수며 무력시위를 시작했어요. 여기에 사회에 불만을 품었던 하층민들이 힘을 더해 폭동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임오군란이에요. 1882년 임오년에 일어난 군인들의 난이란 뜻이죠. 


사람들은 개화파 관료들, 부정부패를 일삼던 민씨 척족들의 집을 차례로 습격해 파괴했어요. 이후 고종과 명성 황후를 비롯한 민씨 척족들을 위협하며 흥선 대원군을 복권시켰죠. 민중들은 개항으로 자신들이 더 가난해졌다며, 쇄국 정책을 고수한 흥선 대원군을 앞세워 조선을 개항 이전으로 되돌리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민씨 척족들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거든요.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흥선 대원군을 납치하고 민중의 난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임오군란은 막을 내렸답니다. 


임오군란의 대가는 컸습니다. 민씨 척족의 요청으로 들어온 청나라가 조선에 눌러앉아 정치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거든요. 청나라 관료를 고문으로 파견해 조선 내정에 개입하는가 하면,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이라는 협약을 반강제로 체결하게 했죠. 이 협약은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임을 명시한 조약으로, 청나라인의 치외 법권등을 보장하는 불공정 조약이었어요. 조선 정부는 청나라의 횡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명성 황후와 민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되찾아 준 청나라에 연신 굽신거리기 바빴죠.      

답답한 현실에 반기를 들다 

김옥균은 민씨 척족들을 중심으로 청나라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조선의 현실에 분노했어요. 그가 꿈꾸던 조선은 이렇지 않았거든요. 여기서 잠깐! 대체 김옥균은 어떤 인물이기에 이토록 청의 내정 간섭에 분노했던 걸까요? 


김옥균은 1851년 충남 공주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어요.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던 그는 22세라는 이른 나이에 장원 급제에 성공하며 정계에 발을 디뎠죠. 이후 사헌부 감찰관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며 두각을 드러냈고, 당대 개화파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입지를 쌓아 갔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김옥균은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체감했어요. 옆 나라들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것처럼 조선도 적극적으로 서구 문물과 근대적인 제도를 받아들여 국제 사회의 일원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죠. 낡은 제도와 관습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조선이 부흥할 길이라고 판단했던 거예요.  1882년 수신사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한 길에 서구식 정부 조직과 제도를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졌답니다. 


김옥균은 조선을 바꾸기 위해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는데요, 대표적으로 경제 정책이 있어요. 그는 국가 재정을 늘리기 위해 일본에서 외채를 빌려 와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개혁이 성공하려면 국가 재정이 넉넉해야 하는데, 그 당시 조선은 자본이 부족했으니까요. 하지만 청나라 재정 고문 묄렌도르프와 민씨 척족을 비롯한 수구파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면 그만이라며 그의 정책을 반대했어요. 이처럼 김옥균의 개혁은 번번이 청나라와 민씨 척족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답니다.      


정변을 일으키다 

자신이 꾀했던 개혁들이 거듭 실패로 돌아가자 김옥균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무력을 이용한 정변 이외에는 조선을 변화시킬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요? 민씨 척족을 제거해 조선이 청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말이에요. 


김옥균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청나라를 조선에서 몰아낼 계획을 꾀했어요. 박영효, 윤웅렬 등의 급진 개화파들과 함께 말이죠. 1,000여 명의 병력을 모으고, 일본군에게 협조를 약속받으면서 차근차근 정변을 준비했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어요. 1884년 갑신년, 청프전쟁이 일어나면서 조선에 주둔하던 청나라군이 일부만 남고 떠났거든요. 


그리고 그해 12월 4일, 김옥균과 급진 개화파들은 우정국 낙성식을 기념하여 국왕 일가와 민씨 척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거사를 일으켰어요. 이들은 먼저 왕이 머무르던 궁궐인 창덕궁에 폭탄을 터트린 뒤 고종과 명성 황후를 경우궁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민씨 척족을 비롯한 수구파를 창덕궁으로 불러들여 제거하고, 고종의 승인을 받아 개혁 정부를 수립했어요.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독립된 국가이며, 모든 백성은 평등하다는 내용의 개혁안도 발표했죠. 이때까지만 해도 김옥균은 자신의 손으로 바꿀 조선의 장밋빛 미래를 꿈꿨을 거예요.


하지만 상황은 김옥균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어요. 이튿날, 정변 사실을 알게 된 청나라가 비밀리에 고종과 명성 황후에 접근했습니다. 정변을 제압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청나라군이 진입하기 쉬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제안했죠. 이에 고종과 명성 황후는 궁이 너무 좁아 생활하기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며 환궁하겠다고 주장했어요. 김옥균이 그 속내를 몰랐을까요? 그는 고종 내외의 이동에 반대했어요. 하지만 고종과 명성 황후는 쉽사리 마음을 돌리지 않았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정변을 도와준 일본 관리 다케조가 귀가 솔깃한 말을 던집니다. 일본군이 개화파를 지원할 것이기에 창덕궁으로 이동해도 청나라군에 밀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것이었죠. 이에 김옥균과 급진 개화파는 왕을 모시고 창덕궁으로 귀환했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청나라군이 창덕궁으로 몰려왔어요. 자신만만해하던 일본군은 제일 먼저 도망쳤고, 급진 개화파도 수적 열세에 밀려 순식간에 무너졌죠. 김옥균은 겨우 화를 피해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쳤답니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어요. 조선 정부는 김옥균을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보내기 일쑤였고, 정변을 꾀할 때만 해도 평생의 동반자처럼 굴던 일본은 그를 안중에도 없는 듯 대했거든요. 김옥균은 죽는 날까지 조선에 발을 들이지는 못했지만, 개혁을 포기하지 않은 채 일본과 청나라를 넘나들며 조선의 변화를 줄곧 외쳤어요. 조선 개혁에 열망이 타오를수록 안전한 삶은 더 요원해졌어요. 결국 그는 1894년 청나라의 실세였던 이홍장을 만나러 중국 상하이에 방문한 길에 홍종우에게 암살당해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자주 개혁과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 

홍종우는 본래 암살자도 군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최초로 프랑스에서 유학한 조선인으로, 당대 손꼽히는 지식인이었어요. 경기도 안산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운 형편 속에 자랐지만 학업을 향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일본을 거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홍종우는 프랑스의 한 박물관에서 연구 보조자로 일하며, 해외에 조선 문화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답니다. 『심청전』·『춘향전』 등 조선 문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출간하거나, 사교 단체에 참석해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서양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했죠. 홍종우는 유럽에서 서구 문화와 제도를 직접 마주하면서도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잃지 않았어요. 그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심청전』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나와요. ‘나라마다 다른 정체를 하고 있다. 우리(조선)는 우리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면서, 유럽 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 홍종우에게서 서양을 일방적으로 선망하는 문화 사대주의 태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죠. 


김옥균을 죽인 공로를 인정받아 홍문관의 관리가 된 홍종우는 고종을 도와 광무개혁에 참여하며 조선의 발전을 꾀했어요. 경제적으로는 국내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 상인들에게 규제를 가하는 보호 상업주의를 제안했고, 정치적으로는 청나라나 일본 같은 열강이 조선의 군사권에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죠. 그는 근대 제도는 수용하되, 조선이 다른 나라의 개입 없이 홀로 서야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더불어 조선의 개혁이 왕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조선 같은 약소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왕이라는 하나의 구심점을 바탕으로 똘똘 뭉쳐야 한다고요.      


같은 꿈다른 방식

갖은 핍박에 울부짖던 민중은 갑신정변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민중은 이를 개혁이 아닌 반역으로 여겼어요. 김옥균과 급진 개화파들이 왕위를 넘봐 일으켰다고 생각했죠. 조선시대까지 약 2,000년 동안 왕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해온 결과 백성들은 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인물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죠. 이런 사회에서 왕을 조그만 궁에 가두면서 실행한 개혁이 긍정적으로 여겨질 리 만무했어요. 개항 이후 일본의 침탈로 생계가 어려웠던 일반 민중들에게는 더욱이요. 일본과 손을 잡고 왕을 위협하는 신하를 누가 좋게 보았을까요? 


홍종우의 생각도 민중과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나 민중의 어려운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던 홍종우로서는 민중을 위한 위해 개혁을 꾀했다는 급진 개화파들의 주장이 크게 와닿지 않았을 거예요. 그들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였을 수도 있어요. 프랑스 유학 생활을 하면서 서구 문물과 제도를 직접 경험했기에 일본과 청나라 외에는 가 본 적이 없는 김옥균의 급진적 개혁이 한낱 치기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죠. 


김옥균과 홍종우 모두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았어요. 하지만 나라를 바꾸는 방식을 두고 서로 의견을 달리했죠. 조선이 평화로웠더라면 이 둘은 서로의 생각을 받아들이며 함께 조선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을지도 몰라요. 슬프게도 실제 역사에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운명을 달리했지만 말이에요. 

매거진의 이전글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까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