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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r 15. 2023

사람을 먹은 우리의 기록

《삼국사기》에 고구려·백제·신라 모든 나라에서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고구려에는 소수림왕이 통치하던 378년에 가뭄으로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국양왕 때인 389년에도 기근으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왕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백제도 비류왕이 통치하던 331년 큰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499년 동성왕 때에도 큰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자, 창고를 풀어 사람들을 구제하자는 관료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여러 왕의 기록에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신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삼국을 통일한 승자이자, 1,000년의 역사를 유지한 나라였던 만큼 배고픔으로 사람을 먹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효심으로 사람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유동보살의 화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신효거사가 아직 출가하지 않았던 시절, 고기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사냥을 나갔다고 한다. 신효거사는 길에 학 5마리가 있는 것을 보고 화살을 날렸으나, 1마리도 잡지 못하고 깃털 하나만 주울 수 있었다. 신효거사가 우연히 학의 깃털로 눈을 가려보니 지나가는 사람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자칫 자신이 사람을 죽일 뻔한 사실에 너무 놀란 신효거사는 더는 사냥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에게 드렸다. 이후 자신이 살던 집을 절로 만들어 효가원이라 부르고, 부처님의 뜻을 따르겠다며 출가했다. 이 기사는 신효거사가 직접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은 아니지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짐승으로 보였다는 점에서 신라도 배고픔으로 인육을 먹는 일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삼국사기》에는 경덕왕 14년(755년) 충남 공주 지방에 살던 상덕이 흉년과 전염병으로 굶주린 부모가 병들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드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에도 상덕은 어머니가 종기로 고생하자 직접 종기를 입으로 빨고,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약으로 드려 병을 치료하였다. 이 효행으로 그가 살던 마을은 ‘효가리’라 불렸고, 넓적다리 살을 벨 때 나온 피가 흘러간 개울을 ‘혈흔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라의 왕도 상덕의 효행을 칭찬하기 위해 마을에 정문을 세워주고, 상덕의 효행을 기록한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이 외에도 경남 진주 출신의 성각이 병든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살을 베어 먹였다는 소식에 벼 300석을 나라에서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도 기근과 전염병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있었겠지만, 삼국을 통일한 승자로서 품격을 지키고자 했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와 차별을 두기 위해 굶주림으로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은 빼고 효행과 관련하여 인육을 먹인 사건만 소개한 것은 아닐까 싶다.


고려시대에도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이 여럿 나온다. 《고려사절요》에 한림학사를 역임했던 김황원(1045~1117)을 기리는 글이 있다. 글에 따르면 김황원이 요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북쪽 지방을 지나가던 중 흉년으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을 보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해 달라고 예종에게 요청했다. 이에 예종은 급히 곡식을 풀어 기근에 서로를 잡아먹던 사람들을 구휼했다. 이후 김황원이 요나라에 건너가 사신으로서 맡은 바 일을 다하고 다시 북쪽 지방을 지나가게 되자, 백성이 자신들을 살려준 상공(相公)이라 칭송하며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명종 3년(1173년)에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나온다. 그해는 정월부터 비가 오지 않아 하천과 우물이 모두 바닥을 드러냈고, 벼와 보리가 말라 죽어갔다. 전염병마저 발생해 굶주려 죽는 자가 많아지자, 국가는 무당을 모아 기우제를 올렸다. 명종은 관료들을 각 산천으로 파견하여 신령에게 비가 내리게 하는 기도를 드리게 했다. 이 모습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배고픔에 인육을 매매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심지어 충렬왕 13년(1287년) 기록에는 자기 자식마저도 배고파서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외에도 《고려사절요》에는 고종 46년(1259년) 몽골군이 기암성을 공격하자, 성안에 갇힌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인육을 판매하고 자기 자식을 먹는 등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끔찍한 일이 우리 역사에 실제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효심으로 자신의 살을 부모에게 먹였던 신라의 이야기와는 달리, 기근과 전염병 그리고 전쟁으로 사람이 사람을 먹는 끔찍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고려시대는 유독 많은 전쟁으로 살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사》가 세종 31년(1449년), 《고려사절요》가 문종 2년(1452년)에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편찬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굶주림으로 인육을 먹고 매매하는 기록이 적혀있는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이후 조선을 건국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하늘의 명을 받아 백성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조선을 부정하고 고려를 다시 세우려는 사람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이들을 끌어안기 위해서 세종과 문종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 역사서 편찬을 통해 고려의 왕이 무능력과 부도덕으로 나라를 망쳤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백성이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서로의 인육을 먹을 정도로 살기 어려운 세상이었다는 것을 부각하면 할수록 조선 건국의 명분과 타당성이 확보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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