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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r 28. 2023

농업발전 1등공신 조백현 박사

부모의 강요로 농업학교에 가다.

대한제국 원수부 군무국장이던 조성근의 아들로 태어난 조백현은 어려서부터 매우 허약했다. 그래서 또래보다 작은 체구로 좁쌀사위라 놀림을 받던 유년 시절의 조백현은 늘 의기소침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조백현에게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진로였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뜻을 어길 용기도 없었다. 그는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업전수학교에 입학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버지의 호령 앞에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결국 공학도의 꿈을 접은 조백현은 농사나 배우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입학한 학교는 고종이 대한제국의 경제발전 토대 마련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세운 근대농학교육기관인 수원농림학교였지만, 조백현에게는 도망치고만 싶은 장소였다. 서울에서 유복한 생활을 하던 16살의 조백현은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수원이 싫었다. 특히 책을 좋아하던 그에게 작물을 재배하는 실습 위주의 교육과정은 체력적으로도 큰 무리를 주었다. 


그런 그에게 인생을 바꿔놓는 기회가 찾아왔다. 수원농림학교 교장 혼다가 농업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원농림학교를 전문학교로 승격시킨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일제가 한국의 식량을 수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조백현에게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수원농림전문학교 1회 입학생이 된 조백현에게서 과거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옛날의 모습을 더는 찾을 수 없었다. 어학, 수학, 물리학, 기상학 등 근대 학문을 배우는 조백현에겐 그전에 볼 수 없던 생기와 열정이 넘칠 뿐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자,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도 변했다. 일제의 수탈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한국인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농업기술의 발전과 보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백현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일본 여러 대학이 수원농림전문학교의 학사과정을 인정하지 않아서 조백현은 입학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규슈제국대학 농학부 창설위원장이 된 수원농림전문학교 혼다 교장이 입학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면서 농예화학과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조백현은 이곳에서 독일에서 생화학(생명현상을 분자 또는 원자 수준에서 연구하는 학문)을 익히고 온 오쿠다의 지도를 받고, 한국인 최초로 생화학분야 논문 <계란 부화에 따른 아미노산의 변천>을 발표한다. 

한국 전통식품과 농업발전을 위해 매진하다.

규슈제국대학을 졸업한 조백현은 전문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승격된 모교 수원고등농림학교 교사로 한국에 돌아왔다. 교단에 선 조백현은 일제의 우민화 교육으로 인해 학교 교사와 학생 대부분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좌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늘 끊임없이 연찬하는 조백현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가장 선진적이고 첨단 분야인 생화학, 발효학, 유기화학, 토양학 등을 학생에게 가르쳤다. 이것은 한국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이기도 했다.


조백현의 수많은 업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국인이 즐겨 먹는 산나물을 연구하여 식품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한 것이다. 그동안 영양이 별로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도라지, 고사리, 쑥, 참외, 질경이 등 산나물 11가지의 영양 성분을 분석한 <한국산 야생 식용식물의 식품적 가치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산나물의 가치를 입증했다. 이 외에도 콩나물처럼 일상생활에서 자주 먹는 두아(물이 잘 빠지는 그릇에 담아 그늘에서 키우는 나물)를 연구한 <두아제조 중 일어나는 제 성분의 변화에 관하여>를 발표했다. 이로써 한국인이 미개하고 전근대적이라서 먹는다고 생각하던 음식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며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현명하고 지혜로운지를 밝혀냈다.


이런 조백현의 연구 활동은 광복 이후에도 계속됐다. 당시만 해도 모든 집안이 직접 메주를 만들어 장을 담갔다. 그러나 비위생적이고 비과학적인 제조 방법으로 썩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조백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짧은 시간 안에 몸에 좋은 박테리아만 배양할 수 있는 개량 메주를 만들어 특허 출원에 성공했다. 그 외에도 김치와 막걸리 등 발효식품을 생산하는 기업에 자신이 개발한 종균 번식을 보급했다. 그 결과 장과 김치, 그리고 막걸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대표 식품으로 세계인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무엇보다 조백현의 가장 큰 업적은 식량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1950~60년대까지 우리는 봄철에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보릿고개를 겪었다. 그는 단기간에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으로 시비법에 착안했다. 그래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도움을 받아 동위원소를 활용하여 벼에 거름 주는 방법 및 시기를 연구했다. 그 결과 벼꽃이 분화하는 시기에 벼의 표층과 하층에 시비를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연구 결과는 대한민국을 넘어 빈곤에 힘들어하는 여러 국가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 농업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

조백현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을까? 아버지는 몸이 약한 조백현을 늘 무시했고, 원하는 진로를 선택하지 못하게 했다. 더욱이 대한제국의 멸망과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협력했던 친일파 아버지를 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조백현은 최소한 아버지에 뜻에 따르지 않고 묵묵히 학교에서 연구과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런 그에게 광복 이후 선친이 저지른 잘못을 갚는 기회가 찾아왔다. 


미군정청이 수원농림전문학교에서 가장 오랫동안 근무한 조백현에게 교장직을 맡긴 것이었다. 하지만, 학생을 가르칠 교사도 확보하지 못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환경에 굴복할 수 없던 조백현은 직접 동문을 찾아다니며 교사진을 확보하는 등 부단한 노력 끝에 1946년 수원농림전문학교를 국립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편입시켰다. 농과대학의 초대 학장이 된 조백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농업 전문가와 관계자 200여 명을 규합하여 학술발표회와 농업 관련 논문을 기재한 <한국농학회지>를 발간했다. 더 나아가 한국식품영양협회와 한국토양비료학회 등에 가입하는 등 농업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6·25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2년도에는 유네스코의 초청을 받아 유럽으로 토양학 연구를 위한 연수를 떠났다. 영국의 농과대학과 토양연구소를 시작으로 독일, 덴마크,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의 토양 연구 시설을 시찰했다. 선진 농법과 연구 시설을 익히기에는 너무도 짧은 8개월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어려운 형편을 생각한 조백현은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조백현은 부지런히 유럽에서 보고 온 선진 문물을 대한민국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런 조백현의 노력에 하늘이 감응했을까. 전쟁으로 피폐화된 대한민국의 재건을 위해 미국 정부의 예산을 받은 미네소타 대학이 서울대의 재건을 지원해주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 농과대학을 대표하여 5개월간 미국의 대학과 연구기관을 둘러본 조백현은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함을 인지하고, 지원받은 120만 달러로 농과대학 수원 캠퍼스에 신관 교사와 강당 등 여러 시설물을 세웠다. 그리고 훌륭한 교수진을 양성하기 위해 농과대학 교수 40여 명을 미국으로 연수보냈다. 그 결과 서울대 농과대학은 8개 학과에서 11학과로 늘어나며 양적·질적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조백현의 열정과 노력은 나이가 들수록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커져만 갔다. 환갑이 되어 1961년 학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조백현은 연구와 강의를 멈추지 않았다. 66살에는 원자력위원회 상임위원직을 맡아 원자력청 산하 방사선농학연구소를 설립하고, 8년 동안 원자력 기술을 농업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1960년대 평균수명이 55세 전후였던 점을 생각하면 조백현이 얼마나 열정적인 인물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조백현의 활동은 1986년 87세가 되어야 멈췄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단지 현장에서 물러났을 뿐이었다. 조백현은 자신의 사재로 화농장학회를 설립하여, 연구자를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화농장학회는 현재 화농연학재단으로 발전하여 매년 농학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연구자에게 화농상을 시상하며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어찌 보면 조백현이 전통 식품 학술 토대를 마련한 공로로 받은 대한민국 공로상(1961), 식량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받은 문화훈장 국민장(1962), 농업기술의 현대화에 기여한 공로로 받은 수당과학상(1977)과 사후 과학기술의 명예의 전당에 헌정(2006)된 것은 그가 이루어낸 업적에 비해 적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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