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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n 27. 2023

수창궁에서 이성계 왕위에 오르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즉위하면서 자신이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까요? 아마도 아니었을 겁니다. 고려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보유한 명장 이성계와 명석한 두뇌로 국정을 주관하는 정도전이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맞서 싸울 자신이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요동정벌을 떠났던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는 순간부터 고려 멸망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고려는 오랫동안 적체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잃어버린지 오래였고, 그로 인해 백성들은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성계는 고통에 신음하는 백성을 위해 위화도회군을 했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해석이 따릅니다. 우선 우왕과 최영 장군이 요동정벌을 내세워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들은 이성계가 살아남기 위해 위화도회군을 했다고 생각해요. 또는 요동정벌에 성공해도 고려가 실효적인 지배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성계가 회군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영구적으로 요동을 확보하지 못하는 정벌은 백성을 사지로 몰아 힘들게 하는 정책에 반대했다고 봅니다. 위 두 가지 주장과는 달리 이성계가 개인적인 욕심으로 왕이 되기 위해 군대를 되돌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성계가 위 세 가지 중 어떤 생각을 가지고 위화도에서 군대를 되돌려 개성으로 내려왔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다른 이유로 위화도회군을 했다고 보실까요?


어떤 의도로 회군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가 권력의 정점에 섰다는 겁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위화도회군 이후 뜻을 함께 했던 조민수를 비롯하여 정몽주 등 자신을 견제하던 세력을 하나둘 제거했어요. 1391년에는 과전법이라는 토지제도 개혁을 통해 자신을 지지하는 신진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었어요. 이로써 고려의 지배계층이던 권문세족의 힘은 약해지고, 이성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준비를 모두 마친 이성계에게 필요한 마지막 과제는 명분이었어요. 현재 고려사람들은 500동안 고려만을 자신들의 국가로 생각해왔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고려가 강제로 멸망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분명 많은 반발이 있으리라는 것쯤은 누구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요. 최악의 경우에는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는 사람들에 의해 큰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고 이성계는 내다봤어요.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고려 왕실로부터 왕위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조선 건국에 대한 명분과 정통성을 가질 수 있었거든요. 


고려 왕실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이성계의 측근이던 배극렴이 총대를 메고 맨 앞에 섰어요. 그는 왕대비를 찾아가 공양왕이 임금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쫓아야 한다고 주청했어요. 말이 주청이지 사실은 반협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배극렴의 주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지만, 왕대비는 거부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고려 왕실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공양왕을 폐위한다는 교지를 내렸어요. 왕으로 즉위하는 날부터 바늘방석에 앉은 듯 하루하루를 마음 졸이던 공양왕은 폐위한다는 교지를 받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오로지 그의 머리속에는 어떡하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일도 없는데, 강제로 즉위했다. 또한 나는 어리석고 둔해서 나라 돌아가는 일을 알지 못했다.”라며 이성계의 행보에 어떤 방해도 하지않았음을 강조했어요. 이 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양왕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길지 않았어요. 태조 3년 김가행과 박중질이 역모를 일으키고자 밀양의 장님 이흥무에게 점을 친 사건이 벌어졌어요. 이 일로 많은 문무백관이 공양왕을 죽여야 한다고 하자, 이성계는 어쩔수없다며 공양왕과 그의 두 아들을 죽여버려요. 이것은 공양왕이 살아있는 한 고려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이성계의 두려움때문이었어요. 결국 폐위되어 원주에서 삼척까지 유배오면서도 살아남고 싶었던 공양왕의 희망은 하늘에 흩뿌려지고 맙니다. 


다시 조선이 건국되는 시점으로 돌아갈까요? 공양왕이 폐위되자 조준과 배극렴 등 이성계를 지지하는 관료들은 기다렸다는 듯 옥새를 받아가지고 이성계의 집을 찾아갔어요. 그리고는 이성계의 마당에 무릎을 꿇고 앉아 국왕이 되어달라고 소리높여 외쳤어요. 잘 짜여진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이성계는 이마에 손을 얹고 매우 아픈듯 밖으로 비틀거리며 나와서는 자신은 왕이 될 자격이 없으니 모두 돌아가라고 말했어요. 그렇다고 눈치없이 물러나면 큰일나겠지요. 최소한 한번 이상은 거절하는게 우리 한국의 오랜 미덕이잖아요. 마당에 있는 모두는 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이성계에게 왕으로 즉위해달라고 거듭 요청했어요. 그제서야 이성계는 본인은 정말 원하지 않으나 많은 이들의 요청과 힘들어하는 백성을 위해 왕으로 즉위하겠다며 수창궁으로 향했어요. 이곳에서 이성계는 왕으로 즉위하며 475년 동안 34명의 왕이 이끌었던 고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한 수창궁은 어떤 장소였을까요? 수창궁은 개경의 서소문 안에 있는 별궁으로 고려시대 이곳에서 많은 사건이 일어났어요. 고려 초 거란군이 쳐들어왔을 때 왕은 수창궁을 버리고 도망갔고, 원나라의 침입때에는 크게 훼손되어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하기도 했어요. 수창궁이 복원된 것은 원으로부터 벗어나 고려를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고 싶었던 공민왕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하지만 홍륜 일파에게 공민왕이 시해당하면서 공사가 멈추었다가 1384년 우왕에 이르러서야 완공됩니다. 


고려의 재도약을 바라며 중건하던 공민왕의 바람과는 달리 수창궁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이 머문 장소이자, 조선의 첫 번째 궁궐이 됩니다. 이성계는 새로운 수도 한양에 경복궁을 짓고 떠나면서 다시는 이곳을 찾아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성계의 바람과는 달리 수창궁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집니다. 악연으로 말입니다.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성계는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자 막내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어요. 이 일로 불만이 쌓이고, 신덕왕후와 정도전에 의해 숙청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방원과 그 형제들은 난을 일으켰어요. 우리는 이 사건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 불러요. 


이방원은 정변을 성공시키고 난 후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죽였어요. 이성계는 사랑하던 두 아들이 죽자, 정변의 주역이던 이방원을 미워하여 둘째 아들 이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어요. 그렇게 제2대 왕으로 즉위한 정종은 피바람이 불었던 경복궁을 떠나 개성의 수창궁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다시 조선의 왕이 머무는 궁궐이 된 수창궁은 태종 이방원이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갔어요. 그리고 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이 수창궁보다는 조선의 임금이 거처하던 경복궁과 창덕궁 등 서울의 궁궐을 기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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