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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l 04. 2023

성종. 삼봉도를 찾아오게 하다.

성종은 1472년 병조에 강원도에 있다는 삼봉도를 찾기 위한 방법을 논의하라고 명령을 내려요.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삼봉도는 우리에게 생소한 지명이에요. 성종이 찾으라는 삼봉도는 지금의 어디일까요? 우선 삼봉도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성종 1년인 1470년이에요. 성종은 영안도(함경북도 옛 이름) 관찰사로부터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백성들이 강원도 바다에 있는 삼봉도로 도망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게되요. 백성이 도망치고 있다는 좋지않은 소식이었지만, 오히려 성종은 백성의 유망보다 삼봉도에 더 깊은 관심을 보였어요. “국토를 넓히고 백성을 많이 모으는 것은 나라가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삼봉도는 우리 강원도 땅에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세종조부터 사람을 보내어 찾았으나 얻지 못하였다. 어떻게 하면 그 땅을 얻어서 백성을 늘릴 수 있을 것인가.”라며 삼봉도가 어디있는지 찾아오라 명령했어요.

박종원을 삼봉도 경차관으로 임명하고 4척의 배에 160명의 군사를 주었어요. 박종원은 삼봉도를 다녀왔다는 김한경을 배에 태우며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삼봉도를 찾아오겠다며 울진포를 출발했어요. 그러나 박종원이 탄 배가 무릉도에서 15리 떨어진 곳에서 닻줄이 끊어지면서 3박 4일을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결국 육지로 돌아와야 했어요. 반면 나머지 3척은 무릉도에 3일간 머물며 섬 곳곳을 수색했으나 빈 집터만 확인하는데 그쳤어요. 


강원도에서 어슴푸레 보이는 울릉도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처럼 보인다해서 붙여진 또다른 이름이에요. 울릉도에는 삼한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어요. 심지어 이곳에는 우산국이라는 조그만 소국이 자리잡아 신라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기도 했어요. 결국 지증왕은 512년 이사부를 보내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을 정복하고, 신라의 영토로 영구히 삼았아요. 고려 시대에도 변함없이 우리 영토였던 울릉도에서 사람들이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며 살아갔어요. 그러나 조선 건국 이후에도 왜구가 끊임없이 울릉도를 침탈하여 노략질을 일삼자, 태종이 1403년부터 울릉도 주민을 강제로 육지로 나오게 했어요. 태종은 울릉도로 군역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많아지면, 왜구가 이를 노리고 울릉도를 침범할 것이라 봤어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왜구들이 울릉도를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아 강원도를 계속 약탈할까 걱정한 태종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어요. 실제로 대마도주 종정무는 태종에게 울릉도에서 자신들이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물론 태종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단칼에 거부해버렸죠.

태종의 섬을 비우는 정책은 세종 대에도 계속 이어졌어요. 물론 울릉도가 사람이 살기에 괜찮은 장소이니 곡식 종자와 농기구를 지급하여 생업을 이어가도록 도와주자는 주장이 나왔어요. 1436년 강원도 관찰사 유계문은 “무릉도와 우산(울릉도와 독도)은 토지가 비옥하고 토산물도 많습니다. 선박이 정박할 만한 곳도 있사옵니다. 이곳에 수령을 두게 되면 장구지책(오래도록 꾀할 수 있는 정책)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세종은 수령을 두어 백성을 옮겨 살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매년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채취하거나 목장을 만들라고 명령했어요. 그러면 왜구가 울릉도를 조선이 관리하는 것으로 여겨 감히 탐내지 못할것이라면서, 울릉도에 살던 사람들을 육지로 나오게 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어요. 1438년에는 울릉도를 비우는 정책을 더욱 강화했어요. 울릉도에서 몰래 숨어살다가 걸리면 교형에 처하는 최고의 형벌로 목숨을 빼앗아었요. 그래서 성종이 파견한 삼봉도 탐색대는 울릉도의 빈 집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에요. 


1차 탐색대가 삼봉도를 찾는 일에 실패했지만, 성종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국토를 넓히고자 하는 마음이 컸던 성종은 삼봉도를 다녀온 사람이 있는지를 더 찾아보라는 명령을 전국에 내렸어요. 이때 영안도 관찰사가 영흥사람 김자주가 삼봉도를 다녀와서 그렸다는 그림을 입수했다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성종은 더욱 자세히 알아보라고 명령했고, 김자주는 삼봉도 앞에까지 갔는데 암석사이로 사람처럼 보이는 물체 30여개를 보고 두려운 마음에 배를 돌려 돌아왔다고 답변을 병조에 올렸어요. 그러면서 덧붙여 하는 말이 자신과 같이 갔던 김한경을 앞장세워 탐색대를 다시 보내면 반드시 삼봉도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김자주의 말이 성종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부풀려졌어요. 삼봉도에 숨어 사는 사람이 천 여명이나 되어서,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병선 40척이 필요하다고 말이죠. 아무래도 자신들만이 삼봉도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로 인해 삼봉도는 국토를 넓힐 수 있는 미지의 섬이 아니라 조선에 협력하지 않는 천여 명이 거주하는 반란 세력이 머무는 섬이 되어버렸어요. 성종은 더욱 무슨 일이 있어도 삼봉도를 찾아 반란세력을 소탕할 필요가 생겼어요. 그런데 정확하게 위치도 모르는 삼봉도로 무작정 군대를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성, 명천, 경성, 부령 등 영안도 사람 32명을 모아 삼봉도에 사는 사람들이 육지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설득하자는 신료들의 의견을 받아들였어요. 성종은 삼봉도를 두 번이나 보고왔다는 김자주에게 선단을 맡기며, 무슨 일이 있어도 임무를 완수하라고 당부했어요. 그러나 이들이 출발한 지 30일이 지나도록 어느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성종과 달리 관찰사 이극돈은 삼봉도가 진짜 있는지 의심스러웠어요. 만약 삼봉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32명의 사람들이 헛되이 망망대해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라며 안타깝게 생각했어요. 또한 김한경의 말을 믿고 영안도 사람들에게 삼봉도에서 살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어요. 결국 이극돈은 깊은 고심 끝에 성종에게 삼봉도를 더는 찾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삼봉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성종은 여러차례 김한경에게 삼봉도로 가는 길을 안내하라고 명령했어요. 그럴때마다 김한경은 거센 바람 등을 핑계되며 출항하지 않았어요.


 결국 1481년 영안도 관찰사 이극돈은 “김한경 무리들이 대중을 미혹하게 한 죄가 분명하니, 극형에 처하여 그 시체를 전국에 있는 백성들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어리석은 백성들도 삼봉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며 성종에게 상소를 올렸어요. 성종도 더는 이 문제를 길게 끌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판단을 했어요. 백성들에게 세금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게해줄수도 있고, 무엇보다 자신이 거짓말하는 김한경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인식이 퍼질까 걱정되었거든요. 성종은 이극돈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김한경을 처형당해 죽습니다. 이후 삼봉도는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후대 여러 학자들이 성종 대에 거론된 삼봉도의 실재가 무엇인지 찾고 있다는 점이에요. 어떤 이는 삼봉도를 울릉도로, 다른 이는 독도로, 또 다른 이는 울릉도와 독도로 파악해요. 그러나 세종대에 우산무릉등처안무사나 무릉도순심경차관을 파견한 사실을 들어, 성종 때에 울릉도나 독도를 이미 알고 있었던 만큼 삼봉도는 제3의 장소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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