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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l 11. 2023

(광해 15년) 대궐이 불에 타다

광해군은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형제라도 괘의치 않고 죽였어요. 1609년 친형 임해군, 1614년 이복동생 영창대군, 1615년 이복동생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을 역모 혐의로 처형했어요. 1618년에는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친모인 인목대비를 경운궁(덕수궁)에 유폐시켜버렸어요이런 행동은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가장 비난받을 수 있는 일이었어요결국 어머니를 유폐하고동생을 죽였다는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삼고 인조와 서인들은 반정을 일으키게 돼요.

출처: 영화 광해

인조가 반정을 주도한 것에는 동생 능창군이 역모로 죽은 것에 기반해요광해군은 무예가 뛰어나고 훌륭한 인품으로 주변 사람들의 칭찬을 받던 능창군이 신경에 거슬렸어요혹시라도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능창군을 중심으로 뭉칠 것을 우려한 광해군은 없는 역모죄를 만들어 죽여버렸어요이 일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은 충격을 받아 40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죽고 말아요그리고 한순간에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능양군(인조)은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역모를 꾸미던 서인들과 접촉했어요


광해군을 도와 국정을 이끌었던 세력은 대북파였어요여기서 대북파가 무엇인지 알아볼까요임진왜란 과정에서 북인은 많은 의병장을 배출하며 정계의 주도권을 잡았어요그러나 선조 말년에 북인은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두고 갈라져요이때 광해군을 지지한 세력을 대북이라 하고영창대군을 지지한 세력을 소북이라 불러요수적으로 열세였던 대북파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학문적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했어요그래서 그 유명한 회퇴변척이 일어나게 돼요회퇴변척이란 대북파였던 정인홍이 문묘종사에 조식(1501~1572)이 빠진 것을 항의하는 과정에서 이언적과 이황을 폄하하자서인과 남인이 반발한 사건을 말해요이것은 단순히 문묘 종사에 관련된 것만이 아니었어요각 당파가 정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다툼이었어요이 과정에서 자칫하면 정계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된 서인은 광해군과 대북파를 내몰고 정권을 잡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인조가 1620년 이서신경진 등 인척들과 모여 반정을 모의하자구굉·구인후 등 무신과 김류·최명길·김자점 등 서인이 몰려들어 참여하기를 희망했어요이들은 여러 논의 끝에 이귀가 평산부사로 부임하는 것을 기점으로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정했어요그러나 비밀이 새어 나가면서 반정을 일으키기도 전에 들통나 실패할 뻔했으나김자점과 심기원이 상궁 김개시를 매수하여 사건을 간신히 무마시켰어요자칫 모두가 죽을 위기를 겪었음에도 이들은 반정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이듬해 훈련대장 이홍립마저 포섭한 반정 세력은 3월 12일 다시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정했어요이 과정에서 실패가 두려웠던 이이반이 반정 사실을 조정에 알렸으나광해군은 이상하게도 이번만큼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어요박승종이 추국청을 설치하여 관련자를 체포해야 한다고 했지만광해군은 후궁들과 연회를 벌이는 것에 몰두할 뿐이었어요오히려 훈련대장 이홍립을 풀어주라고 명령을 내렸어요인조는 여기저기서 삐거덕거리자 거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지체되면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불안감에 급히 군대를 소집했어요이때 반정이 실패할까 두려워한 김류가 한동안 나타나지 않는 소동이 있기는 했으나이괄이 침착하게 반정군을 통솔하여 한양으로 나갔어요그 뒤로 큰 저항 없이 반정군은 창덕궁에 도착했고궁 안에 있던 이항이 돈화문을 열어주면서 반정군은 손쉽게 창덕궁을 점령할 수 있었어요창덕궁에서 큰 전투가 하나도 없었지만북문 담을 넘어 달아난 광해군을 찾는 과정에서 반정군이 들던 횃불이 전각에 옮겨붙어 그만 창덕궁이 불에 타버리고 말아요.


그제서야 반정이 성공했다고 확신한 인조는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경운궁에 유폐되어있던 인목대비를 찾아갔어요인조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이 큰 인목대비가 순순히 윤허를 내려 줄 것이라 기대했어요하지만광해군이 두려웠던 인목대비는 반정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어요무조건 광해군을 데려와 무릎 꿇려야지만 윤허하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광해군을 잡지 못했던 인조가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찰나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한 광해군이 잡혔다는 소식에 들려왔어요비로소 인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어요.


 인목대비는 자신 앞에 무릎 꿇은 광해군을 지금 당장 사형시키라고 요구했어요그러나 인조는 광해군을 폐서인시켜 강화도로 유배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어요대신 이이첨과 정인홍 등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 수십 명을 참형에 처하고, 200여 명은 멀리 유배 보냈어요광해군과 대북파 모두를 처리한 인조는 그제서야 자신을 도와준 이귀 등 서인 세력에게 정사공신를 내렸어요또한 대북파가 차지하고 있던 주요 요직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요이후 대북파는 사라지고서인이 조선 후기 내내 정국을 운영하게 돼요


강화도로 유배된 광해군은 목숨은 건졌지만가족을 잃는 큰 아픔을 겪게 돼요강화도에서 탈출하려다 붙잡힌 광해군의 아들과 며느리는 자결을 명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어요이듬해에는 아내 폐비 유씨가 죽으면서 광해군은 홀로 남아 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이후 병자호란이 끝난 이듬해인 1637년 제주도로 거처를 옮긴 광해군은 1641년 생을 마감하게 돼요무려 15년간 국정을 이끌었던 왕이었지만죽어서 묘호를 받지 못해요대신 폭군이라는 이미지로 오랜 세월 각인되어 버려요


마지막으로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가면서 지은 광해군의 시 한 편을 들어볼까요.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

후덥지근 장독 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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