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죽는데 일조했던 노론의 입장에서는 정조가 왕으로 즉위하게 되면, 자신들에게 복수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정조가 왕이 되지 못하도록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영조의 보호로 실패하고 말았어요. 무엇보다 영조가 83세에 죽으면서, 정조는 왕으로서 갖추어야 덕목과 자질을 충분히 키울 수 있었어요. 하지만 1776년 영조가 죽고 왕으로 즉위한 정조는 늘 생명의 위협을 당해야만 했어요. 심지어 정조 1년인 1777년에는 홍계희의 손자 홍삼범이 궁궐로 자객을 보내어 정조를 죽이려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이외에도 홍계희의 팔촌인 홍계능과 홍삼범의 사촌 홍상길이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을 왕으로 추대하며 역모를 꾀하기도 했고요.
왕이 된 자신을 죽이기 위한 역모들이 일어날 때마다 정조는 홍국영(1748~1781)을 찾았어요. 정조가 의지했던 홍국영은 누구였을까요? 우선 홍국영은 잘생긴 외모에 시와 노래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했어요. 또한 홍국영의 집안도 명문가였어요.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과는 10촌 관계였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오라버니인 김귀주와는 8촌 사이였어요.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 의하면 영조가 홍국영을 손자라고 부를 정도로 아꼈다고 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조와도 어려서 친분을 맺을 수 있었어요. 그러나 정조가 홍국영을 자신의 옆 가까이에 둔 것은 어떤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컸어요.
1772년 25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홍국영은 2년 뒤 정조에게 왕의 덕목을 가르치는 시강원 설서로 임명돼요. 보통 시강원 관원은 자신이 가르치던 세자가 즉위하면 주요 요직을 담당하는 관직을 임명받는 게 관례였어요. 그중에서도 시강원 설서는 정7품에 불과하지만, 삼사 등 청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지름길과도 같은 자리예요. 정조와 홍국영은 이 기간 우정을 다지며, 앞으로 정국을 어떻게 운영할지를 논의하고 서로의 의중을 확인했어요. 이후 홍국영은 홍인한과 정후겸에게 맞서 정조가 대리청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요. 무엇보다 노론 벽파들이 정조를 죽이려는 음모를 막아내며 정조에게 꼭 필요한 존재로 각인되게 돼요.
정조는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홍국영을 승정원 도승지로 임명하여 자신의 옆에 뒀어요. 정조는 홍국영을 왜 도승지로 임명했을까요? 도승지란 왕의 명령과 지시를 각 부서와 관료에게 전달하고, 각종 정책에 대해 조언하는 일을 담당하는 승정원을 책임지는 자리에요. 즉 정조는 국정을 홍국영과 같이 논의하여 결정하겠다는 표현이었던 것이에요. 정조 재위 기간 도승지로 임명된 사람이 85명으로 평균 99일간 재임했어요. 그런데 홍국영이 도승지로 1,204일 동안 있었다는 것은 정조의 신임을 얼마나 받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정조는 정책을 보좌하는 일만 홍국영에게 맡긴 것은 아니었어요. 정조 신변의 안전도 책임지게 했어요. 홍계희 가문이 세 번에 걸쳐 역모를 꾀하자, 정조는 자신의 호위 기관으로 숙위소를 창설하면서 홍국영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주었어요. 또한 5군영 중 훈련대장과 금위대장으로 홍국영을 임명하여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어요.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아는 정조였지만, 홍국영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거든요. 정조는 자신과 함께 새로운 조선을 꿈꾸고 설계한 홍국영 말고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어요. 그렇기에 군권을 부여하고 자신의 옆에서 국정을 보좌하는 일을 맡겼던 것입니다. 홍국영도 정조의 기대에 부응하여,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어요. 당시 최고 권력자들이었던 홍인한·정후겸·홍계능 등에게 죄를 묻고, 정순왕후의 동생인 김귀주를 유배 보냈습니다. 정조를 대신하여 영조와 정조의 외척을 제거하는 홍국영에게 거칠 것이 없었어요. 어떤 권력자도 홍국영 앞에서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홍국영을 보고 정조는 “만약 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었겠는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이런 홍국영의 모습에 박수치며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권력이 집중되는 모습을 경계하는 이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홍국영의 횡포가 정후겸 못지않다는 의미로 대후겸이라 부르기도 했어요.
홍국영은 권력의 본질을 너무도 잘 아는 인물이었어요. 권력을 오래도록 갖기 위해서 송시열의 후손이던 송덕상을 우대하며 산림 세력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만들었어요. 산림이란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학문적 권위로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이야기해요. 그리고는 왕비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기의 13살 된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입궐시켰습니다. 이로써 정조와 처남·매부 사이가 된 홍국영은 이제는 그 누구도 건들 수 없는 막강한 존재가 되었고요. 하지만 권력을 좇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거나, 더 큰 권력을 가지려고 추악한 짓을 저지르죠. 홍국영도 다르지 않았어요. 권력을 가지고 부정된 행동을 하는 자들을 쫓아내고, 조선을 바로잡으려던 홍국영은 모습은 어느새 점점 사라져갔어요.
누이동생이 궁에 들어간 지 이듬해에 죽자, 홍국영은 정조의 비 효의왕후가 독살했다고 의심했어요. 그러고는 누이동생이 독살당한 증거를 찾겠다며 궁궐의 나인에게 칼을 빼 들고 위협하며 돌아다녔어요. 그럼에도 누구도 홍국영을 말리지 못했어요. 독살당한 증거를 찾지 못한 홍국영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을 죽은 누이동생의 양자로 삼아 세자로 책봉하고자 했어요. 이것은 신하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월권행위이자, 왕을 무시하는 처사였죠. 그동안 홍국영의 횡포를 참아왔던 정조도 이 소식을 듣고는 아연실색하고 말아요. 궁궐에서 칼을 들고 궁인을 협박하는 횡포를 부리고, 다음 후계자를 정하려는 홍국영은 더는 자신의 신하가 아니었어요.
1779년 9월 26일 정조는 홍국영을 궁으로 불러서는 한동안 깊은 대화를 나누었어요. 둘이 나눈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전하지는 않지만, 정조와의 독대를 마친 홍국영은 “신이 대궐 문을 나가서 다시 세상에 뜻을 둔다면 하늘이 반드시 벌을 줄 것입니다.”라며 모든 관직을 내려놓았어요. 그리고 정조는 “이전과 이후 천년에 이와 같은 군주와 신하의 만남이 언제 있었고, 또다시 있겠는가. 예부터 흑발 재상은 있었지만, 드디어 흑발의 봉조하도 있게 되었다.”라며 홍국영에 원로대신이나 받을 수 있는 봉조하를 내려주었어요. 봉조하가 뭐냐고요? 봉조하란 사임한 관료에게 국가 의식이 있을 때만 참여하는 대가로 녹봉을 지급하는 것이에요. 즉, 나라를 위해 한 일이 많으니 그 공로를 인정하겠다는 말입니다. 이때 홍국영의 나이가 32살이었어요. 참 젊은 나이죠. 그러니 다른 관료들이 정조가 홍국영의 죄를 묻지 않고 봉조하를 내린 것에 크게 항의했어요. 이에 정조는 “홍국영의 잘못은 모두 짐의 허물이며 과실이다.”라며 더는 항의하지 못하도록 홍국영을 감싸주었어요. 홍국영도 자기가 내뱉은 말처럼 한양을 떠났고, 얼마 뒤인 1781년 강릉 근처 바닷가에서 생을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