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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l 25. 2023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다.

태조는 개경과 특별한 인연이 없었어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도 아니어서 개경 어디에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도 없었거든요. 오히려 개경에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자신을 경계하여, 틈만 나면 해코지하려는 정적으로 인해 한순간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었어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조선 건국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로 인해 더욱 불안한 날들을 보내야 했어요. 하나의 예로 백성들은 정몽주가 철퇴를 맞아 흘린 피가 개천에 들어가자 물고기 지느러미가 모두 붉어지고, 선죽교에 흘린 피는 비가 와도 씻겨 지워지지 않는다며 고려를 그리워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는 개성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어요.

개성을 떠나 새로운 출발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태조 이성계는 신료들을 모아놓고 조선의 새로운 수도로 적당한 장소를 추천하라고 말했어요. 직접 관료 권중화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새 도읍지로 추천한 곳이 계룡산 주변이었어요. 태조가 직접 계룡산으로 내려가 확인해보니, 권중화의 말처럼 계룡산 일대가 한 나라의 수도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었어요. 흡족해진 이성계는 어서 빨리 궁궐과 관청을 짓도록 지시했어요. 그렇게 궁궐을 짓기 시작한 지 10개월이 지났을 무렵 하륜이 조용히 이성계를 찾아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어요. “전하. 계룡산으로 수도를 옮기면 이 조선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제발 다른 곳으로 수도를 정하기를 바라옵니다.”라고요. 태조는 곧 새로운 수도로 옮길 생각에 기분이 들떠있다가, 하륜이 계룡산 일대가 안 좋다는 말에 기분이 확 상했어요. 그렇다고, 조선이 망할 수도 있다는 장소로 수도를 옮기고 싶지도 않았어요.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태조는 신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수도 자리를 모색했어요. 이때 계룡산 일대를 반대했던 하륜은 도선의 비기를 근거로 연희동 일대를 강력하게 추천했어요. 계룡산 일대를 하륜이 원점으로 되돌려놓은 것에 대한 반발이었을까요? 권중화는 연희동 일대를 도읍지로 정하자는 하륜의 주장에 강력히 반대해요. 반대를 위한 반대가 이어지면서 어떤 결론도 나지 않자, 태조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무학대사가 나섰어요. 무학대사는 왕십리 일대를 답사하던 중 신비로운 노인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길 왕십리에서 서북쪽으로 십 리 떨어진 곳이 새 도읍지로 적합하다고 알려줬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이 직접 그곳에 가보니 정말 하늘이 내린 명당이어서, 조선의 새로운 도읍지로 적합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태조는 신료들이 둘로 나누어져 싸우는 것보다는 무학대사의 말을 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는 무학대사가 말한 곳을 새 도읍지로 삼아요. 이곳이 지금의 경복궁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해 내려오는 설화일 뿐, 실제 역사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성리학을 국가 운영 이념으로 삼은 신진사대부들이 누군지도 모를 노인의 말만 믿고 수도를 옮겼을까요? 아니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한 나라를 세우고 경영하는 사람들이 즉흥적으로 누구의 말을 믿고 따르지는 않았을 거예요. 태조와 신료들은 매우 신중하게 새로운 수도로 적합한 장소를 찾아다니며 끊임없이 비교했어요. 이들의 선택한 장소는 고려시대 개경과 서경과 더불어 매우 중요했던 행정 중심지 남경이었어요. 1067년 고려 문종이 궁궐을 지었고, 숙종은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겠다고 종묘사직에 제사를 올릴 정도로 중요하게 관리하던 지역이었어요. 그렇기에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수도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겁니다. 


태조는 한양이 수도로서 적합한지를 다시 한번 최고 정무 기관이던 도평의사사에게 물었어요. 그러자 “앞뒤 산하의 형세가 빼어나고 사방의 도리가 고릅니다. 배와 수레가 통하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 것입니다.”라는 답변을 도평의사사가 올렸어요. 여기서 사방의 도리가 바르고 백성의 뜻에 맞는다는 문구는 한양에 사는 사람들이 조선 건국에 크게 반감을 갖지 않았음을 보여줘요. 한양에 살던 사람들로서는 고려가 망한 상황에서 조선 국왕이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잖아요? 오히려 수도가 되었을 때 얻게 되는 혜택이 훨씬 더 컸으니까요. 또한 배와 수레가 통한다는 말은 한강과 큰 도로를 이용한 교통이 예전부터 발달하여 있음을 보여줘요. 이것은 수도로서 꼭 갖춰야 할 조건이기도 했어요. 

태조는 자신이 살 궁궐만 세워지면 당장 수도를 옮기겠다고 결심해요. 그래서 태조는 한양 천도를 표명한 다음 달인 9월에 임시 관아인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고 수도를 옮길 준비를 하게 했어요. 이에 정도전을 비롯한 심덕부 등 수많은 관료가 하루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수도로서 갖추어야 할 궁궐과 도로 등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태조의 눈에는 너무 더디게 진행되는 것으로 보여 답답하기만 했어요. 결국 자신이 한양에 있어야 작업이 더욱 빨라질 것으로 생각한 태조는 10월 28일 한양부객사로 거처를 옮겼어요. 그러니 관료들이 얼마나 조급해졌을까요. 이성계가 매일매일 공사 진행 상황을 물어보니 일하는 관료들은 죽을 맛이었을 거예요. 태조의 압박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듬해인 1395년 9월에 종묘사직과 경복궁이 완공되면서 한양이 조선의 새 수도가 됩니다.


현재 서울시는 태조가 경복궁 건설을 재촉하기 위해 한양부객사에 머물렀던 10월 28일을 “서울 시민의 날‘로 지정하고 기념하고 있어요. 이날에는 사물놀이나 과거시험 재현 등 조선의 모습을 재현하는 여러 행사가 열려요. 세계적으로도 한 나라의 수도로 6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지역이 많지 않아요. 그렇기에 서울에는 궁궐을 비롯한 과거의 역사와 21세기 미래도시의 모습을 다 가지고 있으며,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세계에 인식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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