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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01. 2023

1413년 의정부 제안대로 호패법을 정하다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조세를 얼마나 제대로 걷을 수 있는가예요. 조선시대 거둬들이는 세금은 토지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일정부분을 거둬들이는 전세(田稅), 지역의 특산물을 거둬들이는 공납(貢納), 토목 공사에 동원되는 요역과 군인으로 복무하는 군역을 합친 역(力), 이렇게 크게 세 가지가 있어요. 이 모든 조세가 제대로 걷으려면 먼저 인구 파악이 제대로 되어있어야 해요. 그러나 고려는 지방관을 파견한 주현보다는 향리가 행정을 담당하는 속현이 많았어요. 그렇다 보니 조세를 내야 하는 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어요. 거둬들일 세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니, 필요한 국가 예산을 정확히 계산할 수가 없었어요. 이것은 나라를 운영하는데 많은 제약이 따랐어요. 또한 관료들이 나쁜 마음만 먹으면 이 점을 악용하여 언제든지 세금을 착복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고려 말은 국가에 들어와야 할 조세가 엉뚱한 곳으로 새어 나가면서 정상적인 국가 운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고려 말의 이런 폐단을 너무 잘 아는 태종은 국가 경영을 위해 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여기에는 조선이 건국한 지 20년이 지나 안정을 이룬 만큼, 어느 누구도 조선을 위협할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깔려있었어요. 더불어 자신의 뒤를 이어 조선을 경영할 왕들이 아무 걱정 없이 국정을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목적도 담겨있어요. 철저하게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1413년 태종은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기 위해 호패법을 시행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호패란 오늘날 주민등록증과 매우 유사한 기능을 하고 있어요. 신분증에 이름, 주소, 사진이 있는 것처럼 호패도 이름, 주소, 인상착의 등을 적어놓았어요. 그럼 호패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을까요? 호패는 3척 7푼(11cm)의 길이, 1촌 3푼(4cm)의 너비, 2푼(0.6cm)의 두께로 만들어졌어요. 갖고 다니기 불편하지 않도록 아이 손바닥만 한 길이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특히 윗부분을 둥글게 제작하여 몸을 찌르지 않도록 하고, 아랫부분은 네모지게 만들어 바닥에 쉽게 세워둘 수 있도록 했어요. 이처럼 호패는 휴대성과 편의성을 고려해 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호패의 재질은 관리 품계와 신분에 따라 달랐어요. 2품 이상의 관원은 상아(사슴의 뿔로 대체 가능), 4품 이상은 녹각(황양목으로 대체 가능) 5품 이하는 황양목(자작나무 대체 가능), 7품 이하는 자자목을 사용하도록 했어요. 반면 일반 백성은 잡목만을 사용해야만 했어요. 호패에 기재되는 내용도 신분에 따라 달랐어요. 관리의 경우에는 관직명, 성명, 거주지, 출생 연도를 호패에 적어놓았어요. 군관은 여기에 소속 기관과 함께 키가 얼마나 되는지까지 표시했어요. 일반 백성은 조세 납부를 거부하고 도망갈 것을 우려하여 얼굴색과 수염 유무를 덧붙여 표시했어요. 노비는 신분이 가장 낮지만, 가장 많은 신상정보가 표기되어있었어요. 당연히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서죠. 이 노비가 어느 집 노비이고, 어디에 사는지 정확하게 기록했어요. 또한 얼굴색, 키, 수염 유무까지 기록하여 호패만으로도 충분히 신상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놓았어요. 호패에 사진이 없어서 위조하기 쉬울 것으로 생각이 드나요? 당시 백성 대다수가 한자를 읽고 쓸 줄 몰랐던 점을 고려해본다면, 백성과 노비들에게 호패는 매우 무서운 물건이었을 겁니다.


호패는 시대에 따라 주관하는 부서가 달라졌어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서울은 한성부, 지방은 관찰사와 수령이 담당하도록 했어요. 호패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우선 호패에 기재할 사항을 단자(종이)로 만들어 각자 제출해요. 2품 이상과 삼사의 관원은 관청에서 호패를 만들어주지만, 일반 백성은 호패를 직접 만들어 가져와야 했어요. 그럼 관청이 단자의 내용이 호패에 제대로 적혀있는지 비교한 후에 확인 도장을 찍어 주었어요. 그러면 이 순간부터 평생 호패를 착용하다가, 죽으면 남은 가족들이 관아에 호패를 반납했어요. 혹시라도 호패가 악용되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 말입니다.


만약 호패를 발급받지 않거나 잃어버린 사람, 남에게 빌려주거나 빌려준 사람, 위조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처벌이 내려졌을까요? 국가는 이들에게 태형이라는 매우 무거운 처벌이 내렸어요. 단 70세가 넘을 때는 태형을 집행하지 않도록 했어요. 또한 호패제를 시행하는데 협조하지 않거나, 관리·감독에 소홀한 관료들에게도 처벌을 내렸어요. 그렇다 보니 호패법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았어요. 호패를 착용하지 않았다고 감옥에 가두는 것이 번거롭고, 이로 인해 민심이 나빠지는 것은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호패로 발생하는 제약이 싫었던 거예요.


그러나 조선 국왕들은 호패법이 국가에 가져다주는 이점이 훨씬 많았기에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세종 때 관료였던 변계량은 “한 고을의 책임자는 마땅히 그 고을의 호구를 알아야 하고, 한 나라의 주인은 마땅히 그 나라의 호구를 알아야 합니다. 백성들이 호패를 꺼리는 것은 부역을 면하려고 하는 것이니, 호패의 법은 마땅히 거행되어야 합니다.”라며 세종의 의중을 대변하기도 했어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던 세조도 호패청을 따로 두어 사무를 전담하게 하는 등 호패법을 정착시키려 했어요. 그러나 호패법이 정착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요. 성종실록에 ‘호패를 받은 사람 가운데 국역을 담당한 양인이 10~20%에 불과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100여 년의 노력으로도 정착되지 못한 호패법은 폐지되었다가 다시 시행되기를 여러 번 반복하게 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인구가 감소하고 토지가 황폐해지며 조선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돼요.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세원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이 시기의 국왕이던 광해군과 인조는 호패법이 시행될 수 있도록 엄격하게 추진했어요. 그러나 왕의 마음과는 달리 신료들은 호패법 시행을 두고 찬성과 반대로 나눠졌어요. 찬성 측의 대표적 인물이던 장유(1587~1638)는 “현재 당면한 일 가운데 호패법의 시행보다 더 중대한 사안은 없습니다. 세수 파악, 군적 결원 충원, 신역 관리 뿐만 아니라 도망치거나 죽은 자로 인한 결손을 보충하기 위해 족속이나 이웃에게 끼치는 폐단을 제거하는 효과가 큽니다.”라고 말해요. 반면 반대하는 대표적 인물이었던 조익(1579~1655)는 “호패를 검사하고 단속하는 것은 백성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무릇 제도란 백성의 삶을 보듬어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현재의 호패법은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군역의 결손을 채우기 위한 법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호패법 정착을 위한 노력은 계속 이어졌어요. 숙종은 휴대하기 불편하다는 호패의 문제점을 해결하여 정착시키고자 했어요. 그래서 딱딱한 재료가 아닌 휴대가 간편하면서도 위조를 방지할 수 있는 종이로 만들어진 지패로 대체했어요. 하지만 호패를 착용하게 되면 군역 등 여러 세금을 내야 하는 만큼, 휴대 여부가 백성에게 중요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조선의 국왕들은 호패제를 정착시키는 일이 큰 숙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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