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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l 17. 2017

이야기가  풍성한 서울성곽 1코스

서울특별시 종로구

                                                                                                    
최규식 경무관 동상


서울성곽길 1코스를 시작하는 창의문을 가기 전 자하문고개에서 내리면 바로 보이는 동상이 있습니다. 바로 최규식 경무관 동상입니다.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를 알 수 있도록 자세한 안내문이 설치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성곽길을 걷기 위해 하차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상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기에 바쁩니다. 가끔 연세가 있으신 분들만이 동상을 바라보며 옛 일을 회상하고 대화를 나눕니다. 대통령을 죽이기 위해 북에서 내려왔던 김신조 일당과 맞서 싸웠던 1.21 사태를 말입니다.


김신조가 누구냐? 김신조는 1.21 사태에서 유일하게 생포된 북한 군인으로 현재는 성락교회의 목사로 있습니다. 1968년 북한은 박정희 전 대통령 및 정부요인을 사살하기 위해 무장공비 31명을 남파했습니다. 무장공비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경찰들의 불심검문에 걸리게 되자 수류탄과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군경과 대치하였습니다. 이때 많은 군경과 시민들이 이 사건으로 다치거나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무장공비들은 29명이 사살되었고 1명은 북으로 도주, 김신조만이 생포되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31명의 무장공비들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서울로 들어왔다는 것에 크게 진노하며 국방력에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 결과 예비군이 창설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최규식 경무관


1.21 사태를 빠르게 진압할 수 있었던 것에는 당시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휴전선을 넘어온 북한군을 파악조차 하지 못했던 군과는 다르게 경찰들은 불심검문으로 무장공비를 파악하고 재빠른 대처를 했기 때문입니다. 최규식 경찰서장은 북한군과 교전 중인 현장으로 달려가 경찰들을 지휘하며 무장공비와 대치하던 중 총탄을 맞고 돌아가셨습니다.


최규식 경무관은 위험하고 어려운 일은 아랫사람에게 떠넘기고 공만 챙기려는 일부 사람들과는 다른 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공직자들이 모범으로 삼고 본받아야 할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라의 혼란을 막아내고 공직자로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최규식 경무관 동상을 뒤로하고 창의문으로 올라갑니다.




창의문


서울성곽 1코스의 시작점인 창의문입니다. 자하문으로도 불리는 사소문의 하나로 서울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창의문은 태조 5년 1396년 축조되어 현재까지 옛 모습을 유지하는 유일한 문이기도 합니다. 창의문은 그리 큰 성문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광해군을 왕의 자리에서 내쫓고자 반정을 일으킨 인조의 군대가 창의문을 통해 사대문 안으로 진입하여 창덕궁을 점령했기 때문입니다. 인조반정은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는 등 조선의 운명을 바꾸어놓았기 때문에 창의문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조 이후의 왕들의 입장에서도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왕이 될 수 없었기에 창의문은 매우 중요하며 감사한 장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 창의문에는 영조가 인조반정을 기억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감사하기를 바라며 성루에 반정공신 이름이 적힌 현판을 걸어놓은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의문 잡상


창의문 처마 위에 있는 잡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보통 궁궐의 전각에는 10개의 잡상이 놓여 있는 것과는 달리 창의문 처마에는 10개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창의문은 사대문을 보조하기 위한 사소문으로 격이 떨어지기에 잡상의 수가 적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잡상에 대한 정확한 역할은 아직까지 알려지지는 않지만 중국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화재로부터 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잡상은 대부분 정교하게 제작되지는 않았지만 처마 위에 잡상이 없다면 허전하지 않을까 싶네요.



창의문 목계


창의문 밖의 지형이 지네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창의문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목계(나무로 만든 닭)를 추녀 끝에 만들어놓았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지네가 독을 가지고 인간에게 피해를 준다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창의문 너머의 안 좋은 기운들이 서울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네를 잡아먹는 닭을 형상화한 목계를 만들어놓고 성문 천장에는 새들의 우두머리인 봉황을 그려놓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 선조들이 미신적이고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봐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에서 건축물에 의미를 담아두는 것은 전통 존중과 함께 백성들의 불안감을 해소하여 편안케 하고자 하는 민본사상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서울 성곽


서울성곽 1코스를 걷기 위해서는 꼭 신분증을 가져가야 합니다. 신분증 통한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친 후 입장할 수 있습니다. 성곽길을 걸으면서도 사진을 함부로 촬영해서도 안됩니다. 정해진 방향으로만 사진 촬영이 가능한데, 그 이유는 이곳이 군사시설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살고 있는 청와대에 근접한 곳이기에 군인들이 이곳을 경계하며 군의 전략적 위치가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니 사진 촬영이 자유롭지 못함을 토로하기보다는 고생하는 군인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눈에 덮인 성곽길


창의문에서 올라가는 구간은 가파른 계단으로 이루어져 쉽게 올라가기 어렵습니다. 몇 번의 깊은숨을 내쉬며 돌계단에 주저앉아 서울 전경을 내려다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그 나름대로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자신의 체력을 측정하겠다고 무조건 앞만 보기보다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면서 올라가는 것이 여행이 주는 선물을 받는 좋은 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성곽에서 본 북한산


성곽을 오르면서 좌우를 살피다 보면 저 멀리 북한산의 모습도 보입니다. 북한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거친 남성이 느껴집니다. 북쪽의 오랑캐로부터 조선의 한양을 지켜왔던 든든함과 함께 인왕산 북악산 등이 북한산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서울을 포근히 감싸안으며 500년의 조선을 묵묵히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마치 부모가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고 모진 풍파로부터 지키며, 아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백악산


백악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해발고도 342m에 불과하지만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면서 우리나라 산 중에 '岳(악)'이 들어가면 매우 험한 산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나 자신에게 칭찬해줍니다. '너는 오르기 힘들다는 악산을 또 하나 정복한 거야'라고 남을 듣지 못하도록 저만 듣게 칭찬해줍니다.



백악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서울 전경


백악산 정상에서 본 서울 시내의 모습은 조용했습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서울은 보이지 않고 한적한 모습만 느껴집니다. 서울 전망 명소라는 곳을 여러 곳 다니며 받은 느낌이 '서울이란 도시가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서울 한 복판에서 어떠한 모습을 만들어가며 살고 있을까? 

이래서 사람들은 산에만 오면 다 신선이 되는가 봅니다.



백악산


백악산을 내려오면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여기에 오르기 전만 해도 백악산을 인왕산으로 혼동했거나 아니면 단순한 산봉우리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이곳을 다녀갔으니 누군가에게 백악산을 가리키며 산에 대해 말할 수 있겠죠. 책 속의 글과 사진으로만 익히고 배우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직접 가서 보고 느끼고 익혀야 오롯이 나의 것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축조 시기가 다른 서울 성곽


서울 성곽은 태조가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조성한 18km에 달하는 긴 성곽입니다. 백악산-인왕산-남산-낙산을 연결하며 낮은 곳에는 흙으로 만든 토성으로 만들고, 높은 곳은 돌로 쌓은 석성으로 만들었습니다. 조선이 얼마나 체계적인 나라였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성곽을 97구간으로 나누어 공사가 진행되었고, 118,049명이 동원되었음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이 왜 기록의 나라이며, 60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유지되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서울 성곽은 세종, 광해군, 숙종, 영조 대에 대대적으로 성벽을 고쳐 쌓았기에 조선 시대의 건축기술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기도 합니다. 사진에서 가운데의 성곽은 세종대왕 때 축성한 것이고, 오른쪽은 숙종 때에 축조된 것입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록 쉽습니다. 성곽 중 유독 새하얀 색을 보여주는 것은 최근 보수작업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성곽이 보수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조선이 무너지고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성곽들이 보존되지 못하고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중 가장 큰 원인이 일본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하면서 성곽이 비루하다는 명목으로 없애버리라 했기 때문이니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인 거죠. 성곽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한 일본 황태자, 그가 비루먹었다고 말하고 싶네요.




여장


조선 시대의 성곽 위의 담장을 여장이라고 합니다. 여장에서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3개 있는데 이를 1 타라고 합니다. 가운데 구멍은 근총안이라고 하여 성곽에 오르려고 근접하는 적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도록 비스듬히 아래쪽으로 향해 있습니다. 좌우의 구멍은 원총안이라고 하여 멀리서 다가오는 적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도록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축조해놓았습니다. 적은 병력으로도 많은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고안한 우리 선조들의 과학기술과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촛대바위


성곽 1코스를 걷는 도중 촛대바위를 지나가게 됩니다. 촛대바위라고 표시해 놓은 곳에서 아무리 쳐다봐도 왜 촛대바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른 풍화작용으로 변화된 것인지 아니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쇠말뚝을 이곳에 박으면서 변형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의 지맥을 끊기 위해 곳곳에 쇠말뚝을 많이 박아놓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쇠말뚝 자리를 보면서 일제가 영원히 한국을 지배하려 했던 의도를 느꼈습니다. 우리 주변에 조금만 눈을 돌리면 일제의 상처가 많이 남아있음에 몸서리치게 됩니다.



말바위 조망명소


말바위에 오르게 되면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명소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은 높은 빌딩이 아니라 6~70년대의 서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서울을 바라보며 이 곳이 왜 말바위인지를 한참 고민했습니다. 보통 지명 이름은 지형이 가진 생김새를 두고 불리어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말바위를 오르내리며 아무리 둘러봐도 말처럼 생긴 바위가 없었습니다. 검색을 해도 이곳이 왜 말바위 인지 잘 나오지 않아 한참을 헤맨 끝에 말바위 유래가 말을 끌고 산을 넘어가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한숨을 돌렸다해서 붙여졌다는 해석을 찾았습니다. 검색 결과를 보면서도 굳이 산 능선을 말을 끌고 올라와야 했는지 의문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말바위 쉼터


제가 다니던 대학에 궁합 나무가 있었습니다. 사진 속 나무와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남녀가 같이 앉을 수 있으면 궁합이 아주 좋다는 전설이 내려오죠. 이곳에서 쉬는 사람들에게 저 나무는 어떤 의미가 부여될까 잠시 생각해봅니다.




숙정문


숙정문은 사대문으로 북문에 해당합니다. 숙정문은 다른 사대문과 다르게 건립되자마자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태종 때 풍수지리가였던 최양선이 자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팔의 역할을 하기에 문을 내면 안 된다고 건의를 받아들여 이후 조선시대 대부분 문을 닫아둡니다. 그 이후 숙정문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문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상징적인 기능으로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뭄이 심할 때 음양오행에 따라 음을 상징하는 숙정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아두었습니다. 그 외에도 숙정문을 열어두면 음의 기운이 서울로 내려와 여자들의 품성이 음란해진다고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로서 여성의 활동을 제약하는 부분이 늘어나면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숙정문은 조선이 끝나고 일반인들이 왕래하며 문의 기능을 다시 되찾은 것도 잠시였습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다시 문이 걸어 닫히면서 사람들의 통행이 막히게 됩니다. 1968년으로부터 38년이 지난 2006년 다시 사람들이 왕래하게 되었으니 숙정문의 운명도 기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숙정문 잡상


창의문은 사소문이고 숙정문은 사대문이라 잡상의 크기와 개수가 다른 것인지 아니면 1976년 숙정문이 복원될 때 제대로 고증되지 않은 것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둘의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선조들의 건축물들이 모두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만의 색채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울 성곽


숙정문을 뒤로하고 걸으면서 성벽을 다시 바라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성벽의 색깔이 다름을 다시 보게 됩니다. 성곽의 색이 어두울수록 많은 일들을 함께 겪으며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 새로 덧 데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 손 때가 묻어있어 우리에게 더욱 소중한 물건처럼 느껴집니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현재 복원해 놓은 부자연스러운 성곽도 자연스럽게 기존의 성벽과 어우러지겠죠.




말바위 안내소 눈사람


말바위 안내소를 지키고 있는 눈사람을 보면서 든든한 장군을 연상했습니다. 짙은 눈썹을 통해 강인하면서도 옅은 미소를 볼 때 마음은 부드러운 눈사람이라는 상상을 입혀봅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잘 만들었습니다. 칭찬해드리고 싶네요.

서울 성곽길을 걸으면서 복잡한 도시를 떠나 시간탐험을 제대로 했나 봅니다. 성곽길의 마지막 구간을 지나면서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는 저의 모습을 봅니다.




와룡공원으로 가는 길


와룡공원으로 혼자 내려가면서 설경을 감상합니다. 1000만이 넘는 복잡한 서울 속에서 몇 시간을 홀로 걸으면서 많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성곽길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자 불안해지고 초조 해지기 시작합니다. 다시 내가 있던 복잡한 서울 도시로 들어갈 시간이 되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겨우 반나절밖에 보내지 않음에 사람들이 그리워집니다. 그래서인지 저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집니다. 와룡공원으로 나와 마을버스를 타고 성균관대를 지나 도심에 접어들면서 하루 중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합니다. 저녁으로 무슨 음식을 먹을지 고민하는 일상으로 곧 되돌아옵니다. 나만의 시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허전함이 안도감과 일상에서의 무덤덤함으로 곧 대체됩니다.


그래도 가끔 혼자 걸으며 내가 좋아하는 역사를 만나는 시간을 또 기다려봅니다.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에 더 달콤한 시간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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