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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15. 2023

근대 연극의 아버지, 현철 2/2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하다.

현철은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 행동으로 옮겨 1923년 동국문화협회를 창설했다. 그리고는 동국문화협회 산하에 ‘항일 이념 하에 단합할 수 있는 민중문화의 창출’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배우를 양성하는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하였다. ‘배우양성의 시대요구’, ‘인격자의 배우를 양성’, ‘사회가 요구하는 배우’ 등 조선배우학교 학제는 현철이 무엇을 꿈꾸고 바랐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선배우학교는 2년제 학교로서 연극과와 영화극과로 구성되어있었다. 과마다 각각 1년 기한의 보통과와 고등과를 두고, 예술개론, 각본연구, 군중심리학, 무대극감상법, 표정체조, 조선가곡, 분장술, 가극실습 등 23개 과목을 가르쳤다. 1925년 40여 명의 학생으로 조선배우학교가 개교했지만, 현철은 원하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대중들의 연극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었다. 당시의 배우는 선망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배우를 딴따라·광대로 부르며 무시하고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무엇보다도 현철이 추구했던 연극이 민중에게는 낯설고 원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현철은 대중이 좋아하는 전통극과 일본에서 들어온 신파극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쓴 <현당극담>은 “내가 지금 우리 조선에는 연극이 없다고 하면 독자 제위는 나를 욕하고 허언이라 하며 그 연례로 소위 구극에는 춘향가나 심청가를 들고 신파로는 임성구 김도산 김소랑을 들어 내게 육박할 줄 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던 극단을 가지고는 여러 가지 극과학상으로 보아 연극이 아니고 유희이며 체조라고 한다.”라며 전통극과 신파극을 강하게 무시했다. 여기에는 현철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상업적 연극을 지양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현철의 생각을 모두가 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싫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예를 들어 조선배우학교 제1기 학생들이 올린 입센의 <인형의 집>과 체호프의 <곰>, <개> 공연은 지식층에게 환영받았지만, 대다수 사람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현철을 향해 이기세는 “현철이 주장하는 형태의 연극이 조선 사회에서 실현되어야겠지만, 민중이 연극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네. 연극을 천대하는 현 사회에서는 시기상조일세.”라며 비판했다. 이기세의 말처럼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 조선배우학교는 개교한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위기에 빠졌다. 수입이 적어 학교 운영을 위한 재정이 마련되지 않자, 현철과 학생 간에 마찰이 발생했다. 결국 간극을 좁히지 못했고, 조선배우학교는 2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하지만 현철은 포기하지 않았다. 1927년 조선극장을 경영하며 배우들이 연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1928년에는 동국문화협회를 예술문화협회로 바꾸고, 배우양성소를 설립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이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뜻을 함께하겠다는 조선배우학교 1기 졸업생이 강사진으로 참여하면서 보다 양질의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여기에 용기와 힘을 얻은 현철은 ‘경성예술학원 야학부’를 추가로 설립했다. 1934년에는 극작가이자 연극인인 박승희와 토월회 후신인 태양극장을 재건하며 연극의 발전과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현철의 부단한 노력이 가져온 변화

현철의 노력은 일제 강점기 말이 될수록 빛을 잃어갔다. 일제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수탈이 더욱 많아졌고, 한국인은 경제적 빈곤으로 연극에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더불어 일제는 연극을 통해 자기 뜻에 반하는 행동이 일어날까 경계했다. 그렇게 현철이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렇다고 연극에 대한 현철의 생각과 의지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가 끝나자 현철은 <한국 급 한국인>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분단 아래 혼란스러운 현실로 또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현철은 「고우 윤백남에 얽힌 회상」에서 “나의 자서전 제4편에 사면초가라는 한 편이 있다. 이것은 내가 일생을 걸어 나온 행로 중에 예술학원으로부터 조선배우학교로 조선영화제작소로 여러 가지 문예 방면의 사업설계라고 할까. 이러한 것의 실패담을 말한 것이다. 나는 헛된 생에서 헛된 사(死)로 돌아가는 가시밭길에서”라며 자신의 연극 인생을 평가했다. 이를 통해 현철이 걸어왔던 연극의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가 느껴진다. 

여기에 “10여 년의 활동 역사를 쌓아온 신파까지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선구자적 의식만 앞세웠던 점은 한계다.”, “현철의 연극론 <문화사업의 급선무로 민중극을 제창하노라>는 그의 독창적인 주창의 글이 아니고, 일본 구와키 겐요쿠가 쓴 <세계 개조의 철학적 기초>라는 글을 요약, 발췌, 인용한 것이다.” 등 현철은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아시아 모든 국가가 연극을 알지 못했다. 그런 현실에서 현철은 일본의 연극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현철이 연극을 통해 무엇을 꿈꿨는지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연극을 통해 한국인에 삶의 활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주역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개벽>에 발표한 <소설개요>와 <소설연구법>은 우리나라 소설의 이론을 체계화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희곡의 개요>는 희곡의 구조와 서양의 희곡이론을 소개함으로써 연극이 체계화되는 기초가 되었다. 힘들어도 자신의 선택한 길을 묵묵히 걸어왔던 그가 있기에 우리의 연극이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반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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