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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Q&A

by 유정호 Mar 18. 2025

예종은 어떻게 왕이 되었나요?

세조의 둘째 아들입니다. 저번 시간 세조의 의경세자 이야기 들려드렸잖아요. 단종보다 한 달 전에 죽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단종의 어머니가 세조에 대한 복수로 죽었다고 생각했다고 말이에요. 예종은 의경세자의 동생으로 세조가 즉위한 지 3년이 되는 해인 1457년 세자로 책봉되어요.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예종은 세조를 많이 닮았다고 해요. 영특하면서도 강단이 있었고, 무엇보다 세조처럼 국왕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종이 즉위했을 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맞습니다. 세조를 국왕으로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던 한명회와 집현전 출신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신숙주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죠. 세조도 말년에는 한명회와 신숙주를 견제하기 위해서 왕족 출신인 구성군 이준과 종친이던 남이 장군에게 힘을 실어주었어요. 실제로 이들은 어린 나이에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며 매우 빠르게 조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했죠. 그렇기에 훈구세력인 한명회와 신숙주와 신진세력은 구성군과 남이가 권력을 두고 서로를 견제하는 가운데 예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시애의 난은 무엇인가요?

조선 전기 북방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토착민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과거에 합격하지 않아도 관직을 내렸어요. 이때 이시애도 중용되어 병마절제사 등을 거치며 여진족을 토벌하여 지역민의 영웅이 됩니다. 그러나 세조가 중앙정부의 영향력을 지방에 확대하고자 관료를 파견하자 위기감을 느끼면서 반감을 갖게 됩니다. 결국 1467년 이시애는 부친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올라와 함경도 사람을 모두 죽이려한다”라며 거짓말로 사람들을 모아 절도사 강효문과 길주목사 설징신 등 수령을 죽이며 반란을 일으켜요.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에 혼란을 주기 위해 강효문이 한명회와 신숙주와 손잡고 함경도 군대를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거짓 정보를 줍니다. 세조는 잠시지만 이시애의 거짓말에 속아 한명회와 신숙주를 잡아 옥에 가두죠. 그러나 곧 거짓임을 알고 한명회와 신숙주를 풀어주고, 구성군과 남이에게 3만의 군대를 주어 진압하도록 합니다. 이 과정에서 남이 장군은 북청전투에서 몸에 4~5발의 화살을 맞으면서도 군대를 진두지휘하여 승리를 거두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합니다.


남이의 관직이 매우 높아졌겠는데요.

네. 남이 장군은 그 뒤로도 명나라 군대와 함께 남만주에 있던 건주여진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추장 이만주를 죽이는 등 큰 공을 세우며 적개공신이 됩니다. 이후 세조는 한명회와 신숙주를 견제하기 위해 26살에 불가한 남이장군을 공조판서 및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는 겸사복장에 임명합니다. 하지만 이듬해 자신보다 구성군이 더 빠른 승진을 하는 것이 불만이던 남이장군은 연회 도중 세조가 구성을 편애한다고 말했다가 하루 동안 투옥되고 겸사복장에게서 파직되어요. 그러나 두 달 만에 공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직한 뒤 병조판서에 오릅니다. 27살의 나이에 국방부 장관이 된 거죠.


한명회와 신숙주가 가만히 있었나요?

아니요. 한명회와 신숙주는 한계희 등 여러 대신들을 내세워 병조판서의 자리에서 끌어내립니다. 또한 남이장군과 구성군이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합니다. 남이 장군의 야망이 컸던 만큼 동갑이지만 자신보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긴 구성군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총대장이 되고, 난을 진압한 이듬해에는 영의정까지 오른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게 했죠. 결정적으로 병조판서에 오른 지 13일 만에 세조가 죽고 예종이 죽으면서 남이 장군은 몰락하게 됩니다.


예종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내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누구와 손을 잡고, 누구를 버려야 할까 말이죠. 생각보다 답은 명확했어요. 한명회와 신숙주는 나이가 많은 만큼 19살의 예종이 정치적 식견을 갖출 때는 늙어 죽지 않겠어요. 반면 남이와 구성군은 자신과 비슷한 연배인데,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면 딴마음을 품지 않을까 말이에요. 특히 평소 자신의 생각을 크게 표현하지 않는 구성군보다는 괄괄했던 남이 장군이 더 견제했겠죠. 그래서 예종은 즉위하는 날 바로 남이 장군을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좌천시켜 버려요.


남이 장군은 가만히 있었나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국왕이라는 자리가 가진 막강한 힘을 무시할 수도 없었고, 노련한 정치가였던 한명회와 신숙주도 무시할 수 없었죠. 무엇보다 남이 장군을 도와줄 사람이 매우 적었다는 거죠. 결국 병조참지였던 유자광이 남이가 궁궐에서 숙직할 때 혜성이 나타나자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라고 고변해요. 이 말은 역모를 꾀하고 있다 해석되는 만큼 남이 장군은 바로 역모죄로 붙잡혀 고문당했고, 사흘 뒤 거열형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후 예종은 어떤 정치를 펼쳤나요?

예정은 재위 기간이 1년 3개월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일을 해냈어요. 삼포에서 일본과의 사무역을 금지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요. 관청이나 병영을 위해 운영되는 둔전에서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애민 정신을 보여줍니다. 또한 <천하도>라는 지도를 만들어 조선이 자주국임을 보여주었죠. 이뿐만이 아니라 조선 건국부터 예종까지의 정변과 전쟁을 모두 기록한 <무정보감>을 간행하기도 합니다. 아버지 세조가 마무리하지 못한 <경국대전> 편찬사업도 이어갔고요. 하지만, 예종이 한명회와 신숙주보다 먼저 죽으면서 그가 꿈꾸던 수많은 사업이 멈추게 됩니다.


예종은 재주가 출중했는데, 우리는 왜 남이 장군을 더 기억할까요?

아무래도 뛰어난 전공을 세웠던 남이 장군이 억울하게 죽은 모습이 안쓰러워 그러지 않을까요? 남이장군의 어머니도 거열형으로 처형되고, 딸은 한명회의 노비가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남이 장군이 있었다면 조선이 더 강대한 나라로 발돋움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고요. 여기에 수백 년 동안 무속인들도 남이 장군을 모셔 왔으니, 민중에게 가까운 존재로 자리매김했을 겁니다. 또한 우리는 남이 장군의 묘가 있는 남이섬이라는 유명한 관광지 덕분이기도 하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춘천에 남이 장군 묘가 왜 있나요?

사실 남이섬에 있는 남이 장군 묘는 가묘에요. 남이 장군의 후손들은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는 묘에서 제사를 지내요. 하지만 실제로는 남이 장군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가을동화로 유명해진 남이섬을 방문하게 된다면 남이장군 묘 주변에 있는 돌은 절대 가져오지 마세요. 전해오는 이야기를 따르면 남이 장군의 묘를 돌무더기로 덮어서 만들었는데, 이 돌을 가져오면 집에 우환이 생긴다고 해요. 다행히도 지금은 유원지로 개발되면서 돌무더기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어서 돌무더기는 볼 수 없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남이 장군 주변에 돌이 보인다면, 그 돌은 절대로 주워오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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