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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을 초월한 우정 2/2

by 유정호

국채보상기성회와 신민회 본사로 사무실을 내주다.

베델과 양기탁은 일본 침략에 맞서 목숨을 내걸고 나라를 지키려 했던 수많은 의병의 소리를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전했어요. 의병을 폭도라고 규정하면서 한국인에게 큰 피해를 주는 존재라고 주장하던 일본 태도가 잘못이라고 정면에서 반박했어요. 의병은 특별한 사람이 아닌 우리 가족과 이웃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렸어요. 의병이 어떤 연유로 사랑하는 가족의 품을 떠나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는지를 <대한매일신보>가 알리자, 의병에 대해 오해하던 사람들의 인식이 크게 바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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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빚진 돈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베델과 양기탁은 누구보다 먼저 앞장섰어요. 성금을 모으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안전하게 성금을 모을 수 있는 장소일 거예요. 지금처럼 은행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던 만큼, 큰돈이 안전하게 보관되어 올바르게 사용된다는 믿음을 국민에게 심어줘야 했거든요. 그 최적의 장소로 선정된 곳이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이었어요. 이것은 어느 언론사보다 <대한매일신보>가 적극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을 국민에게 알리고 있었고, 민족지도자 양기탁이 주는 신뢰감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이뿐만이 아니에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비밀리에 조직된 신민회가 활동할 수 있도록 신문사 건물을 제공하기도 했어요. 이것은 대한매일신보사가 일제의 마음대로 들어와 수색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덕분에 신민회는 학교를 설립하고 민족 산업을 육성하는 것을 넘어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베델을 내쫓고, 양기탁을 구속하다.

일본은 <대한매일신보>를 운영하는 베델과 양기탁이 너무 밉고 싫었어요. 그러나 영일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인이던 베델을 비밀리에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총영사관과 함께 베델을 기소검사가 법원에 심판을 구하는 행위해요. 그 결과 베델은 6개월 근신이라는 유죄판결을 받게 돼요. 베델은 재판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항소하지는 않았어요. 혹시라도 한국에서 추방당할까 걱정되었거든요.




그렇다고 올바른 소리를 목 높여 이야기하는 것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서 장인환과 전명운이 을사늑약이 한국인에게 좋은 일이라고 홍보하던 스티븐스를 죽인 사건을 신문에 대서특필했거든요. 일본은 더는 참지 못하고, 외국인이 발행한 신문도 압수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여 <대한매일신보> 신문을 압수하는 등 물리적인 압력을 가했어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베델이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 보호제도를 전복하려 했다는 죄명으로 다시 기소했어요. 그 결과 베델은 중국 상하이고등법원까지 출석하여 재판받고, 3주일 복역과 350파운드를 공탁금을 내게 되었어요.


일본은 동시에 국채보상운동으로 모인 성금을 횡령했다는 죄명으로 양기탁을 구속했어요.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어요. 성금을 관리하던 양기탁이 체포되자 국채보상운동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어요. 여기에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일부 사람들은 일제의 의도대로 성금이 나라를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됐다며 화를 냈어요. 다행히 횡령 사건이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조작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베델이 제시하며 양기탁은 억울한 누명을 벗게 돼요. 그러나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어요.


베델은 이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너무 상했어요. 일본의 끊임없는 위협과 협박으로 인해 건강했던 베델은 서른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심장확장심장이 정상보다 커지는 질병으로 죽고 말아요. 베델은 죽는 순간 양기탁에게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해 한국 민족을 구해주시오.>라며 유언을 남겼어요. 베델이 얼마나 우리 한국을 사랑했는지가 느껴지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베델의 유언을 양기탁은 지킬 수 없었어요. 일본에 의해 양기탁은 4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거든요. 이 기간 동안 <대한매일신보> 소유자가 바뀌면서 일본의 식민 지배를 찬양하는 <매일신보>로 바뀌게 돼요. 일본은 여기서 끝내지 않았어요. 서울 마포 양화진에 묻혀있는 베델의 묘소를 찾아가 묘비 일부를 훼손하기까지 했어요.


베델 몫까지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양기탁은 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했던 베델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너무도 감사했고 미안했죠. 그리고 부끄럽기도 했어요. 훗날 죽어서라도 베델을 만날 수 있다면 독립된 나라에서 행복하게 사는 한국의 모습을 들려주고 싶었어요. 그렇기에 양기탁은 죽는 날까지 일분일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어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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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풀려난 양기탁은 서간도로 망명하여 흩어져있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는 데 노력했어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연해주로 넘어가 <한인신보>를 발간하여 한인의 권리를 확보하는데 노력하는 동시에 독립군을 양성하는데도 힘을 기울였어요. 그렇게 만주와 연해주를 넘나들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던 양기탁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연락을 취해왔어요.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힘들어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달라고 말입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한 양기탁은 1934년 1년여간 국무령으로 취임했어요. 이 기간 양기탁은 중국에 흩어져서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독립을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신의 몸은 하나도 챙기지 않고 말입니다. 결국 양기탁은 1938년 68세에 중국 강소성 율양에서 순국하게 됩니다. 그토록 원하던 독립을 보지 못하고요.


그러나 두 분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어요. 두 분의 한국을 사랑하는 진심은 많은 사람을 변화시켜 독립운동에 매진하도록 만들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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