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하게 된 베델
어니스트 T. 베델(Ernest T.Bethell)은 1872년 영국에서 태어났어요.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집안은 너무도 가난해서 고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베델은 돈을 벌기 위해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낯선 일본으로 건너가 무역업에 종사했어요. 그러나 너무 착하고 정의로웠던 베델은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서 많은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그런 베델에게 <데일리 크로니클>에서 대한제국에 건너가 러일전쟁1904년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 지배를 두고 벌인 전쟁을 취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일본과 가까이 있어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낯선 대한제국에 가볼 좋은 기회라 생각한 베델은 흔쾌히 수락했어요. 이 결정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대한제국의 모습은 일본인이 부정적으로 말하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어요. 베델은 세상 어느 곳보다 순수하고 착한 한국인을 만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점점 커졌어요. 이런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본도 미웠지만, 당하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묵묵히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는 한국인을 볼 때마다 답답했어요. 현재의 대한제국이 처한 사실을 알려 위기에서 벗어나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어요.
그런 가운데 베델을 분노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어요. 바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였어요. 일본은 사용하지 않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대한제국의 경제를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황실 소유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으려 했습니다. 독립운동단체였던 보안회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을 막기 위해 결성된 독립운동단체가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에 넘겨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국민 여론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왜냐면, 일본이 한국 신문이 일본군사기밀을 누설한다며 검열 등으로 언론을 탄압하고 있었거든요. 이 과정을 본 베델은 조영수호통상조약영국민의 지위를 보장하는 내용이 담긴 조약에 따라 일본이 영국사람인 자신을 건들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한국을 위한 신문사를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아직은 한국 문화와 정서 그리고 언어 등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어요.
영어에 능통한 양기탁을 만나다.
베델의 마음이 하늘에 전해져서일까요? 신문사를 설립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을 소개받게 됩니다. 바로 양기탁이었어요. 양기탁은 서양 문물이 국내 어느 곳보다도 빠르게 전파되었던 평양에서 1871년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유학을 통해 충효를 배웠고, 외국어 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한 양기탁은 뛰어난 인재였어요. 얼마나 뛰어났는지 궁금하죠? 양기탁은 20대에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S. 게일을 도와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자전』을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어학사전은 단순히 영어만 잘한다고 가능하게 아니에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의 지식을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거든요. 독립협회가 설립된 이후에는 만민공동회 간부로서 나라의 자주권을 확립하고자 동분서주 뛰어다녔어요. 이런 모습에 감명받은 많은 사람이 양기탁을 믿고 따랐습니다.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된 이후 일본과 미국에 3년을 머물며 국제 정세를 파악한 양기탁은 마음이 급해졌어요. 대한제국의 앞날이 풍전등화바람앞의 등불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급한 상황을 표현하는 사자성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확인했으니까요. 양기탁은 이상재와 이상설 등 민족지도자와 비밀결사단체인 개혁당을 결성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큰 성과 없이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양기탁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일본에 맞서 기필코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어요.
이때 베델이 한국의 목소리를 제대로 실을 수 있다는 신문사를 같이 운영하자는 제의는 가뭄에 단비와 같았어요. 양기탁은 모든 일을 제쳐놓고 베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1904년 창간합니다. 베델은 사장으로 취임하고, 양기탁은 총무이자 주필신문사의 행정과 편집을 책임지는 직위로서 활동하며 <대한매일신보>를 실질적인 운영했어요. <대한매일신보>는 한국인을 위한 국한문판과 한글판과 함께 외국에 대한제국의 소식을 알리는 영문판<코리아 데일리 뉴스>도 함께 발행했습니다.
일본의 강압에 맞서 소리를 내다.
베델과 양기탁은 우선 일본이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어떤 의도가 담겨있는지를 국민에게 알리는 데 노력했어요. 황무지 개간권이 일본에 넘어가는 순간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오는지도 말입니다. 이런 활동은 황무지 개간권을 저지하고자 했던 보안회에게 큰 힘이 되었어요. 일본은 <대한매일신보>가 한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하고,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다른 나라에 알리는 것이 너무 싫었겠죠. 그래서 베델이 <AP(The Associated Press) 통신> 서울 주재 통신원을 맡지 못하도록 일본 공사관 출입을 막고, 신문 발간 찬조금도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베델과 양기탁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국인이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황무지 개간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자, 일본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됩니다.
베델과 양기탁은 황무지 개간권을 저지시켰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면서도 두려웠어요. 둘은 대한제국에 밀려오는 위험스러운 커다란 파도 일부를 간신히 막아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거든요. 둘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을 협박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외교권을 상실하여 주권국가로서 지위를 상실하게 됨을 체결했어요. 이에 수많은 한국 신문들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중에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 <황성신문>1898년 남궁억이 외세침입을 막기 위해 창간에 장지연이 기고한 「시일야방성대곡」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장지연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고 <황성신문>은 정간되고 말았죠.
이에 <대한매일신보>는 <황성신문>의 복간을 요구하는 글을 연신 신문에 게재했어요. 더 나아가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으로 번역해 전 세계에 알렸어요. 여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고종이 독일과 러시아 등 여러 열강에게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 알렸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대한매일신보>로 인해 속을 앓아야만 했습니다. 반면 일본이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사실을 확인한 베델과 양기탁은 일본의 행보를 막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일본에 맞서 싸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