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건설 경제적 효과

by 유정호

13회에 걸친 정조의 수원화성 행차

정조는 재위 동안 총 13회에 걸쳐 수원 화성을 다녀왔습니다. 이렇게 국왕이 공식적으로 수도 밖으로 이동하는 것을 행차라고 부릅니다. 정조가 수원 화성으로 행차한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은 『조선왕조실록』만이 아니라, 수원 화성 축성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그리고 행차의 전 과정을 상세히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 등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정조가 한 번 행차하면 정말 많은 사람이 동원되며 조선을 크게 뒤흔들었습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이자 유명한 행차는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60세 생신)을 기념하며 현륭원을 참배한 을묘원행입니다. 무려 1,800여 필의 말과 6,000명에 달하는 인원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한강을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이야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어 건너는 일이 어렵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배로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르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았거든요. 특히나 강에 빠지는 등 사고로 국왕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고려 정종이 임진강을 건널 때 사용한 배다리에 착안하여 조선 왕들도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하고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국왕들, 특히 태종은 배다리의 안정성 문제로 담당 관리를 파직할 정도로 배다리에 대한 신뢰가 높지 않았습니다. 백성들도 배다리 설치 과정에서 강제로 선박을 비롯한 물자를 빼앗기고, 무보수로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불만이 높았습니다. 특히 연산군이 개인적인 유흥을 위해 수시로 백성을 동원하여 배다리를 놓을 때는 원성이 하늘을 찌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배다리에 대한 인식과 운영방식이 남달랐습니다. 배다리 제작을 위해 『주교지남』을 편찬합니다. 이 지침서에는 배다리를 놓을 장소로 노량진 나루터를 선정한 이유부터, 배의 크기와 높낮이를 고려하여 60척의 배가 필요하다는 계산, 배다리에 사용할 나무판자의 너비와 두께, 그리고 다리 위에 잔디를 효율적으로 까는 방법까지 배다리에 대한 모든 것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동원되는 선박의 수를 대폭 줄이는 등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정조의 세심한 노력입니다. 예를 들어 동원된 선박마다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출납과 인수인계를 명확히 하여 분실되거나 사적으로 유용되지 않게 관리했습니다. 자발적으로 선박을 내놓는 선주들에게는 이익이 돌아가도록 보장해주는 반면, 동참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에 맞는 합당한 처벌을 내리고요.


또한 큰 비용이 드는 배다리 건설이 일회성으로 소모되는 것을 막고자, 정조는 자신의 행차 이후에도 그대로 두어 백성들이 편하게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합니다. 국왕이 지나간 배다리를 자신도 걷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한강을 편하게 건널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몰리자, 정조는 성문과 강의 주요 지점, 그리고 역참 등에 한자와 한글로 '다리가 약해져 얼음을 밟으면 위험하니 조심하라'라는 경고문을 게시하여 안전사고를 미리 방지하는 노력도 빼놓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해 포졸을 강 언덕에 배치하여, 한 번에 많은 사람이 몰려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인파 통제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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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과 백성의 소통 창구 화성행차

조선시대는 지금과 달리 백성들의 의견이 국정에 바로 반영되기 어려웠습니다. “민심이 천심이다.(백성의 마음이 하늘의 뜻이다.)”라며 신문고를 만들어 백성의 이야기를 듣고 정책에 반영하려는 노력을 펼쳤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신문고가 왕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하는 제도이긴 했으나, 그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까다로웠거든요. 무엇보다 왕이 백성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유명무실해지기 일쑤였습니다. 여기에 신문고를 울리려는 백성이 한양까지 올라와야 하는 만큼 지리적·경제적 부담으로 지방민이나 천민은 사실상 이용하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궁궐 안에 신문고가 설치되어 있었고, 주인이나 관료를 고발하는 것을 금지하여 신분제 사회였던 당시로서는 이용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격쟁'이라는 제도가 백성에게는 억울함을 해소하며 사회를 변화시킬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격쟁이란 국왕이 행차할 때 백성이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 같은 악기를 치거나 큰 소리로 억울함을 직접 호소하던 일을 말합니다. 행차를 방해한 죄로 체포된 백성이 소란을 피운 이유를 전해 들은 국왕은 사태를 조사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국왕이 수원 화성으로 행차한다고요. 한양까지 올라올 수 없던 억울한 백성들에게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습니다. 정조가 수원 화성을 다녀오는 데 보통 8일 정도가 소요될 정도로 천천히 움직였던 만큼, 백성에게는 국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격쟁의 시간과 기회가 더 많이 주어졌으니까요. 정조 역시 백성의 소리를 하나라도 더 들어 민심을 파악하고 다독이고자 행차하는 동안 격쟁이 자주 울리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러한 정조의 애민 정신을 잘 보여주는 장소 중 하나가 서울 노량진에 있는 용양봉저정입니다. 정조는 한강을 건넌 후에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반드시 백성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민원을 해결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행위는 백성을 괴롭히며 부당한 이익을 취하던 관료나 양반, 대지주, 대상인과 같은 기득권층에게는 굉장히 두렵고 부담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정조가 수원 화성으로 행차하는 동안 활용한 격쟁은 단순히 개별 민원을 처리하는 것을 넘어, 왕의 권위를 높이고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지방 행정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하여 조선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아주 효과적인 통치 방법이었고요.





수원화성 행차가 가져온 경제적 변화

정조는 수원 화성을 상업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 수원 화성 내부에는 여러 시장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근처에 곡물, 의류, 생활용품 등을 판매하는 다양한 시전들이 형성되면서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여기에 신해통공의 영향으로 자유로운 상업이 가능해지자, 인근 농민들은 직접 재배한 쌀, 채소, 과일 등을 시장에 내다 팔면서 수입을 늘렸습니다. 아울러 화성 건설 과정에서 필요한 벽돌, 기와, 나무 등과 관련된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공방이나 상점들도 자연스럽게 늘어났고요.


수많은 인원이 이동하는 국왕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는 경제 활성화에도 강력한 긍정적 에너지를 불어넣었습니다. 국왕을 비롯한 수행원, 군사, 그리고 이를 지켜보려는 구경꾼들이 대거 몰리면서 숙박과 음식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면서 행차 길목마다 수많은 주막이 들어섭니다. 아울러 행렬에 필요한 방대한 물품의 운송과 중개를 담당하는 여각도 늘어났습니다. 또한 행차 행렬에 식량, 의복, 말의 사료 등이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과정에서 주변 농민과 상인들에게 새로운 소득원을 제공하면서 생산과 유통이 확대됩니다.

정조는 이러한 역동성을 일시적인 현상에 머물게 하지 않고, 수원 화성이 지속 가능한 경제와 행정의 중심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정책적인 뒷받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대규모 행차를 뒷받침하기 위해 한양과 수원을 잇는 주요 도로를 확충하고 교량과 하천 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등 혁신적인 교통 인프라 구축에 힘썼습니다. 그 결과 체계적으로 정비된 교통망과 물류 기반이 상인들의 유입을 촉진하여 정기 장시의 활성화와 상업 인구증가라는 선순환 구조를 완성합니다. 이처럼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는 대규모 국책 행사를 상업활동 증대로 연결해 조선 후기 경제 전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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