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깊은 북관대첩비 반환

by 유정호

북관대첩비는 숙종 때인 1708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정문부가 함경도 길주 등지에서 가토 기요마사 군대를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입니다. 러일전쟁 당시 함경북도에 진주해 있던 제2사단 제17여단장 이끼다마사스끼 소장이 과거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조선에 패배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일본으로 가져가요. 1905년 일본에 도착한 북관대첩비는 일본 황실에서 보관하다 야스쿠니 신사 유치관으로 옮겨 보관하도록 합니다.


1909년 일본에 유학 갔던 조소앙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하고 크게 분노해요. 「대한흥학보」에 <누가 이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 것이며 큰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라며 북관대첩비를 강탈한 일본을 꾸짖는 글을 기고합니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가 되기 바로 직전이었던 만큼 북관대첩비를 가져오려는 어떤 노력도 이루어지지 못해요. 그리고 일제강점기 내내 북관대첩비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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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가 다시 알려진 것은 1978년이에요. 재일사학자 최서면은 동경한국문화 연구원에서 발간하는 「한(韓)」의 기고문에서 북관대첩비를 이야기해요. 이에 정문부 문중인 해주정씨가 한일친선협회를 통해 야스쿠니 신사에 북관대첩비를 반환해달라는 요청을 보내요. 이듬해인 1979년에는 박정희 정부가 직접 일본 정부에 반환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북한 지역에 있던 북관대첩비였던 만큼 조총련이 대한민국으로의 반환에 강하게 반발해요. 북한도 북관대첩비의 원소재지임을 강조하며 일본에 반환을 요구합니다. 일본 정부는 이점을 이용하여 반환하지 않아요.


1994년 김영삼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북관대첩비 반환을 공식적으로 다시 요청해요. 이에 야스쿠니 신사는 북관대첩비는 함경북도 길주군으로 반환하는 것이 옳다고 말해요. 그러면서 한국과 북한이 의견을 조정하여 일본 정부에 의뢰하면 반환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혀요. 그러나 당시로서는 북한과 의견을 조율하기 힘든 시점이었어요.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 남북한 관계가 경색되어 있었거든요. 그래도 1997년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한일문화재교류위원회가 발족하면서 반환에 대한 희망이 갖게 돼요. ‘북관대첩비 반환추진위원회’는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와 일본 왕의 만남을 성사시켜요. 이때 황세손 이구가 아키히토 일본 왕으로부터 북관대첩비 반환 동의를 얻어냅니다.


1999년에는 세계무역센터협회 가이 토졸리 총재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관대첩비 반환을 추진해요. 그해 세계무역협회 총회에서 북관대첩비 반환 운동을 세계무역센터가 공식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해요. 위원회는 북관대첩비를 부산을 통해 한반도에 반환한 뒤, 판문점을 통해 북한 측에 인도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남북 정부에 논의하겠다고 발표해요. 이런 노력의 결과 북한 이형철 유엔 전권대사로부터 북한이 인수하겠다는 서한을 받아왔고,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도 북관대첩비가 판문점을 통과할 때 평화유지군 병사가 호위하겠다고 약속해요. 남북한 정부 간의 조율이 남았지만, 관계가 좋았던 만큼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어요. 그러나 1999년 6월 15일 연평해전이 벌어지면서 다시 반환이 중단됩니다.


2003년 한일불교복지협회가 북관대첩비 반환이 곧 성사될 것 같다며 문화재청과 외교부 등에 지원을 요청해요. 그런데 야스쿠니 신사가 한국 어떤 단체와도 반환을 약속하지 않았고, 남북이 통일된 후 정식 요청해야 가능하다는 의사를 밝혀요. 이에 한일 불교복지협의회가 2005년 3월 베이징에서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과 만나 북한반환에 관한 합의문을 채택해요. 이를 계기로 6월 한일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반환에 합의하면서 100년 만에 반환되게 됩니다. 그리고 현재 북관대첩비는 북한에서 인도하여 관리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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