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개혁법의 득과 실

by 유정호

조선은 농업국가를 표방했고, 그에 맞는 정책을 꾸준하게 펼쳐왔어요. 그러나 세도정치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이 토지를 빼앗기고 힘들게 살아가야 했어요. 그들에게 가장 큰 꿈은 내 땅에서 농사지어 수확한 곡식으로 가족과 배부르게 먹고사는 것이었어요.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들은 독립된 나라에서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토지 개혁 약속했어요. 다만 구체적으로 토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에 대한 차이만 있을 뿐이었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의 패망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면서 국민이 그토록 원하던 토지 개혁은 뒤로 미뤄지게 됩니다.


미군정은 일제가 한반도의 토지를 빼앗고 관리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신한공사로 개편해요. 그리고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 소유 농지를 귀속농지로 규정하여 신한공사에 귀속시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최대 70~80%까지 납부하던 소작료를 1/3로 제한하는 3·1제를 시행해요. 하지만, 기존의 지주소작 관계를 인정하면서, 토지를 갖고 싶어 하던 한국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해요. 반면 북한은 1946년 3월 5일 지주가 소유하던 토지를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빼앗는 다음 소유권을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시행해요. 이것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북한에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한 술수였어요. 나중에 북한은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토지를 국유화시킵니다.





대한민국 정부도 수립되자마자 토지 개혁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요. 국가의 가장 큰 부분을 찾지 하는 토지 개혁인 만큼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면서, 농지개혁법이 시행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어요. 1949년 1월 농지개혁법안이 제출된 1950년 3월 25일이 되어서야 법안과 시행령이 완성됩니다.


이승만 정부가 결정한 농지개혁법은 북한과 달리 유상매수 유상분배의 원칙을 따랐어요. 정부는 평균 생산량의 1.5배를 토지가격으로 책정한 다음, 지가증권으로 5년간 지주에게 토지 대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토지를 사들였어요. 여기에는 지가증권이 기업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자금으로 재투자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있었어요. 반면 소작농은 경작 가능한 면적의 토지를 먼저 받은 다음 정부가 매수한 농지가격과 동일한 금액을 현물로 5년간 내도록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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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농지개혁법 제정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많은 토지가 개인 간 거래로 소유권이 바뀌었어요. 그 결과 농지개혁으로 정부가 분배한 농지는 약 58만 정보로 1945년 소작지 면적의 약 40.4%에 불과했어요. 즉, 농지개혁법이 시행되기 이전에 많은 농지가 비싼 가격으로 소작농에게 판매되면서 농지개혁의 효과가 반감된 것이에요. 또한 6·25전쟁 기간 농지개혁이 중단돼요. 농지분배는 전쟁 이전에 완료되었지만, 토지를 판 지주에 대한 보상과 농민들의 상환 등이 지연되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죠. 또한 전쟁과 물가상승으로 지주들은 정부로부터 받은 지가증권을 생활비로 사용하다 보니 산업자본으로 재투자 되지 못해요. 농민들도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현물로 토지 대금을 납부하다 보니 농사를 지을수록 손해를 보는 일이 많아졌어요.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정부에게서 산 토지를 되파는 일도 벌어져요. 그렇다고 농지개혁이 실패한 것만은 아니에요. 농지개혁은 지주와 소작농이라는 구조를 없애고, 근대적 토지 소유를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해요. 무엇보다 농사짓는 사람이 농지를 가져야 한다는 경자유전의 원칙에 부합하는 농촌사회를 만들어요. 이것은 일한 만큼 대가를 가져가는 자본주의가 대한민국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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