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의 막사이사이상 수상

by 유정호

필리핀의 R.막사이사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토지 분배와 부정·비리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에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1957년 필리핀 세부의 한 대학에서 연설을 마치고 수도로 돌아오던 중 비행기 사고로 죽어요. 미국 록펠러 재단은 살아있는 동안 존경받는 모범을 보인 막사이사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50만 달러를 기부해요. 이 기금을 바탕으로 그의 생일인 8월 31일마다 종교, 국가, 인종, 계급에 상관없이 아시아를 위해 공헌한 사람에게 막사이사이상을 수여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장준하가 막사이사이상을 최초로 수여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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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되지만, 자대 배치 후 6개월 뒤 탈영해요. 한국인으로서 독립군과 싸운다는 것은 장준하에게 있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탈영 이후 김준엽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 입교하여 훈련받은 장준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향해요. 2개월간 추위와 배고픔으로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충칭에 도착한 장준하는 이범석이 이끄는 한국광복군 제2 지대에 배속돼요. 이곳에서 미국 OSS와 국내진공작전을 위한 훈련을 받지만, 안타깝게도 일본의 갑작스러운 패망으로 작전이 취소돼요. 광복 이후 장준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비서로 국내로 돌아옵니다.


장준하는 1953년 통일과 민주주의 그리고 경제발전 등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갈 바를 제시하는 내용의 월간종합잡지 「사상계」를 발행해요. 「사상계」는 전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창간호가 3천 부가 발간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어요. 이런 노력에 힘입어 장준하는 1962년 한국인 최초로 막사이사이 언론 문학 부문 수상자가 돼요. 수상 이유로 <지식인들의 국가재건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 불편부당한 잡지를 발간함에 있어 성실성을 나타냈고, 금전상의 이익이나 정치적 권력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새로운 세대를 계몽해 그들로 하여금 보다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길을 찾게 했다>라 제시돼요. 이후에도 「사상계」는 박정희 정부의 잘못도 과감하게 비판하면서 발행 부수가 10만 부를 넘길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려요. 하지만 1970년 박정희 정부는 「사상계」가 김지하의 <오적시>를 게재한 것을 문제 삼아서 폐간시켜요.


장준하는 「사상계」 외에도 개인적으로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로 독립군에게 총부를 겨누었다. 과거 공산주의 남로당 조직책으로 있을 당시 조직원 동료를 팔아 자기 목숨을 살린 사람이다. 국민을 물건으로 취급하여 우리나라 청년을 월남에 팔아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라며 박정희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계속 이어갔어요. 그로 인해 1966년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복역하게 됩니다. 이때 장준하는 정치인이 되어 박정희 정부의 독재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감옥에서 동대문 을구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요. 감옥에서 선거운동을 펼치지 못했음에도 장준하는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됩니다. 하지만, 얼마 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국회가 해산되고 1972년 유신체제가 출범하게 돼요.


이에 장준하는 개헌 100만인 청원 서명운동에 나섰고, 10여 일 만에 30만 명이 서명받아내요. 다급해진 박정희 정부는 긴급조치를 발표하여 장준하를 구속하고, 15년 형을 선고해요. 이 소식에 미국을 비롯한 국내외에서 장준하를 석방하라는 압력이 밀려오자 박정희 정부는 구속한 지 11개월만인 1974년 12월 3일 석방해요. 하지만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장준하가 실족사로 죽어요. 아들 장호권은 장준하의 시신이 너무 멀쩡하고, 누가 끌고 갈 때 생긴 것처럼 겨드랑이에 멍이 있었다고 밝혔어요. 여기에 장준하가 추락하는 모습을 봤다는 증언이 거짓임이 드러나며 의문사가 제기됩니다. 그러나 2004년 다시 진상조사를 하지만, 자료 부족으로 죽음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발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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