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생활의 모든 것을 담을 업무 지침 에세이
몰스킨 노트
아웃룩 모니터 화면에서 폭발간지 몰스킨으로 시선이 향한다. 이름하여 N2 스마트펜 전용 몰스킨 노트다. 스마트펜 N2는 필기감이 구려서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충전하고 전용노트를 열심히 갖고 다니던 그때도 참 좋았지만 디지털화된 아날로그 메모를 다시 보지 않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현재는 마치 얼음 위로 미끄러지는 듯한 부드러운 필기감의 ZEBRA SARASA 3+S(샤프) 볼펜을 사용한다. 필기를 엄청 하기 때문에 리필 심이 많이 필요하다. 나의 하루 업무 시작은 매일 해야 하는 할일 (재고 수불 및 서류 정리 등)을 하고 난 뒤에 노트를 펼치는 데서 시작한다. '오늘도 시작해보자'하며 난잡한 연필 통에서 SARASA 볼펜을 쥔다.
기억복원 작업 and 날씨
'어제는 무슨 일을 했더라' 우선 어제 적은 메모를 살펴본다. 기본적으로 나의 머리는 회사에서 나가면 회사 일은 모두 지워버린다. 메모를 보면서 PC의 하드 보안관처럼 다시 기억을 복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날짜 옆에 날씨를 적어두기 때문에 날씨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어제의 날씨와 오늘의 날씨가 비교 가능하다. 어제는 비가 조금 왔는데 오늘은 조금 흐리다 흩뿌리는 비로 바뀌었다. 난중일기의 내용에 대해 아시는 분은 이순신 장군님이 날씨의 변화에 대해서도 적었다는 걸 알 거다. 최근 한산도도 다녀오고 난중일기 떠라 하는 느낌으로 날씨의 변화도 적어본다. 이놈의 장마는 언제 끝날지 하면서 젖은 채로 회사 바닥에 뒹구는 비닐에 싸여 부식해가는 느낌이 드는 우산을 한번 쳐다본다. 비가 오는 건 정말 싫다.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비로 인해서 옷이 젖는 건 더 싫다. 대학 졸업식 때도 비가 와서 촉촉한 머리를 뽐내면서 사진을 찍었었는데 우산은 정말 싫다.
어제의 '오늘 할일'
몇 초 간의 우산에 대한 단상을 거두고, 일로 돌아와서 시선을 옮겨가며 메모를 하나씩 훑어본다. 처음부터 쭉 살펴보면서 빠진 일이 없는지 확인한다. 우선적으로 어제 적은 '오늘 할일'을 본다. 완료된 일은 빨간색으로 줄을 쫙 긋는다. 줄이 안쳐진 업무는 완료되지 않았거나, 혹은 완료했는데 줄을 안쳤거나 하는 업무다. 어제의 '오늘 할일' 중 완료되지 않은 일들이 오늘의 '오늘 할일'로 이동 한다. '오늘 할일'에 대해선 조금 있다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자.
메모의 가공
기본적인 메모는 검은색으로 적어두고, 할 일은 빨간색, 생각은 파란색으로 적는다. 그런데 이 체계가 정확히 지켜지는 건 아니다. 할 일도 생각도 검은색으로 적어놨다가, 다음에 검토하면서 생각을 추가(파란색)하거나, 할 일을 추가(빨간색) 하는 경우도 많다. 원칙은 정해놓지만, 편한 대로 하면 된다.
마킹의 중요성
일을 놓치지 않으려면 검은색 이외의 것으로 표시해놓는 것이 검토할 때를 위해서 좋다. 검은색 필기의 바다에서 의미 있는 검은색을 따로 건지기 위해 사투를 벌여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것이다. 분명히 적어놨는데 발이 달려서 메모장 바깥으로 외출하진 않았을 텐데... '못 찾겠다 꾀꼬리'다. 중요한 수치나 사람, 업체 등의 키워드는 형광펜으로 표시해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형광펜은 자주 꺼내진 않으나 한번씩 심심할 때 책 읽듯이 표시하면서 읽는다. 가능하면 매일 하나의 루틴으로 삼고 실천하는걸 추천한다.
메모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어제는 이 일을 안 했군, 오늘을 꼭 하자.
어제 보고를 했어야 하는데 팀장님이 퇴근해서 못했군 바로 보고하자.
이 일은 하기가 싫다. 일단 홀딩 (복잡한 업무나, 처음 해보는 일, 타 부서와 연관된 일인 경우가 많다)'
메모를 검토하면서 생각을 추가해나간다. 그리고 어제 업무 처리할 때 적지 못한 업무 진행상황도 추가하면서 전진한다. 웃긴 생각이 나면 그것도 적어 둔다. 다른 팀원이랑 인사하면서 지나갔는데 어색한 미소가 웃겨 보여서 '어.미'라고 적어놨다. 이런 메모는 나중에 보면 재미있다. 그냥 머릿속으로만 하던 생각이 문자로 흘러 나오면서 생각이 확실해지고 견고해진다. 검토 중 할 일이 생기면 바로 처리하거나 '오늘 할일'에 추가한다. 생각보다 이렇게 검토하면서 챙겨지는 업무가 생각보다 많다. 어제 연락하다가 진행이 안된 업체라든지, 하다 중단된 일들이 하나 둘씩 비가 올 때의 지렁이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전날 마감을 다음날 아침 진행하면서 놓친 업무를 챙길 수 있다는 건 메모의 좋은 기능이다.
'아 어제는 성공적이었지만 남은 일이 몇 개 있네. 오늘도 파이팅'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일은 정말 하기 싫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뒤에 가서 더 커질걸 알기에 그냥 한다. 마치 눈 한 뭉치가 굴러가면서 점점 눈사람이 되듯, 미뤄 놓은 일은 눈사람이 되어 나에게 어퍼컷을 날린다. 눈 한 뭉치일 때 해결하는 습관은 많이 미뤄본 경험에서 체득하기도 했고, 주위에서 바로 바로 처리하는 걸 보고 배운 것도 크다.
오늘 날짜는
이렇게 어제 하루를 마무리 하고 오늘로 넘어온다. 날짜를 적는다.
2016-07-07 (목) 날씨 : 흐림 비는 안 옴, 상태 : 생각보다 괜찮음.
날짜를 적는 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이며, 후에 날짜 별로 검토하기 위한 필수항목이다. 날짜는 메모 상단에 무조건 적어야 한다. 날짜를 모르는 건 나를 기억상실증 환자로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개인적인 일의 경우엔, 일어난 사실만 알고 그 시기는 몰라도 되는 경우가 많지만 회사 일은 아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 정착된 나름의 방식이다. 매일 적는 사람은 어느 정도 추적이 가능하겠다. 하지만 회의할 때나 필요할 때만 메모하는 사람은 꼭 날짜를 적어두도록 하자.
0900, 1305 식으로 메모마다 시간이 적혀 있기 때문에 오전엔 뭘 하고, 오후엔 뭘 했는지 알 수 있다. 시간이 없거나 메모가 없는 경우는 바쁜 날이거나, 업무 지시로 인해서 시달린 날인 경우가 많다. 보통 8시 후반에서 9시 초반의 시각이 제일 처음 적혀 있다. 매일 하는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는데 보통 20-30분 정도가 걸린다. 그 이후 메모장을 보면 9시 정도가 된다.
한 줄의 메모를 적는다.
0844 : 원자재 투입 결정, □업무협조전 결재 및 □창고 통보 □ 공정 담당자 확인 후 투입일 확정
해석해보면, 새로운 원자재 투입이 결정됐다. 이 건과 관련돼서 연구팀에서 넘어온 업무협조전을 상신하자. 그리고 창고에 다음주부터 들어갈 예정이니 자재가 다른 창고에 있으면 이동시켜 놓기 위해 미리 말해주자. 공정 담당자와 투입 날짜를 확정하자. 이런 식으로 일반적인 의식의 흐름을 기록해 두고 업무를 쪼개서 적는다. □ 표시는 처리 여부를 체크 하기 위해서 넣어둔다.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쳐놔도, 빨간색으로 적어놔도 된다. 나는 에버노트의 체크박스가 귀여워서 저것도 한번씩 쓴다.
오늘의 '오늘 할일'
그리고 '오늘 할일'을 적는다.
사실 위에서 적은 내용도 오늘 할 일이다. 오늘 할 일은 오늘의 일간 계획이다. 생각나는 일은 모두 적어둔다. 오늘 다 하면 좋은 거고, 아님 내일 일로 넘어간다. 사실 관리자급 이하에서는 일의 우선순위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똥줄 타도록 마감이 오늘이나 내일인 업무는 먼저 처리하고, 나머지 일들은 닥치는 대로 정리하면 된다. 오늘 할 일을 하나씩 생각해본다. 오늘 할 일은 위에 나온 메모처럼 구체적으로 적지 않는다.
오늘 할일 : 원자재 투입 준비, 구매품의, 전월 실적, 서류 정리, 차주 입고 계획, 심사 대비
이런 식으로 오늘 할 일을 적어둔다.
'일 진짜 많네... 나만 일하나? 일은 왜 끝이 없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이런 식으로 푸념하며 생각나는 일들을 하나씩 적어둔다. 이런 식으로 머릿 속에 생각나는 할 일을 모두 적는다. 하루가 지나가다 보면 여기서 추가될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 오늘 할 일에 적힌 일들을 모두 할 수도 있고, 하나도 못할 수도 있지만, 시각적으로 자신의 할 일을 정리된 상태로 볼 수 있어서 좋다. 하루치 목표가 있는 것이고, 우리는 목표를 완수하려는 의지를 지닌 고등 동물이기 때문에 방향을 갖고 추진력 있게 일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 할 일에 파란색으로 박스 처리를 한다. 이건 오늘 할 일이니 자주 보라는 말이다. 마킹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하고 있는 나란 사람, 대견하다. 나름대로 정착된 업무 시스템이지만, 언제 바뀔지는 모른다. 수많은 업무 시스템을 갈아타면서(언제 한번 다룰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엔 정말 정착한다면서 정착한건데, 나의 마음은 갈대와 비슷하니 언제 바뀔진 누구도 모른다. 내가 회사에 언제까지 있을지 누구도 모르는 것과 비슷하다. 하나의 시스템을 유지해나가는 것은 내 마음과 환경의 변화를 이겨내고 지겹게 하나를 고집하는 건데 이건 흡사 한가지 맛의 과자를 계속해서 먹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도 몽쉘은 맛있다. 질릴 만 하면 당기고 그렇다. 계란은 좀 좋은거 썼음 계속 사랑해줬을 텐데 말이다.
오늘 할 일을 다 적고 나서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새치기 업무
'자까 대리'
'네 팀장님' 하면서 노트를 들고 간다.
'다음주부터 나 출장이니까 그 전에 결재 할거 있으면 빨리 올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빠진 결재 건을 바로 노트에 적어둔다. 회사 일을 하다 보면 끼어드는 업무가 많다. 바쁜 상황이라도 주위에서 요청이 들어오면 먼저 해결해줘야 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전화로 해서 바로 답을 구하는 사람들은 정말 싫다. 자기 업무가 편하자고 남을 괴롭히는 것과 비슷하다. 어느 정도 시간을 갖고 이메일로 요청하면 기록도 남고 좋을텐데, 이런 환경은 어쩔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요청하는 건은 급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센스와 급한 거냐 물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적당히 미뤄도 되는 일, 혹은 바로 해야 하는 일은 경력이 차면 감이 오기 시작한다. 팀장 급에서 시키는 일은 의사결정을 위한 데이터 정리가 많기 때문에 급한 경우가 많다. 되도록 바로 바로 처리한다. 나 자신으로 인해 전체 업무가 미뤄지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일을 처리하는 게 회사에서 개인이 완급 조절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스킬이란 생각이 든다.
'오늘도 빠듯한 하루가 되겠어. 그래도 다음주면 출장 가시니깐 조금 프리하겠지?' 생각하면서 일을 처리한다. 업무 하는 도중에도 생각은 끊임없이 떠오른다. 정신 노동자는 이런 생각병에 사로잡힐 확률이 높은 것 같다. 하나의 사안에 대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선 좋으나 모든 분야에 이렇게 적용을 해버리면 피곤한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조심하도록 해야한다. 점심시간에 산책하는 것도 생각을 비워내기 위해서인데 걸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상념이 나를 괴롭힌다. 생각병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온전히 생각을 비워내는 시간을 찾아야겠다는 또 다른 생각이 든다.
시간 적기의 중요성
0915 : 품의 상신, 조직 개편으로 인한 전결 기준 파악 필요
이런 식으로 시간을 적는 이유는 러시아의 철학자 류비셰프의 영향이다. 메모로 끝을 보고 시간 관리에 있어서 연간 예측과 실제의 차이가 1-2% 내외였던 기록과 통계의 달인이다. 여기에 감동 받아서 Timeit이란 어플로 각 시간 별로 어떤 업무를 했는지 파악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비슷한 행동의 일환으로 네 자리 시간을 적으면서 일을 한다. 이렇게 해놓으면 오전 오후를 착각하지 않을 수 있다. 오전인지 알았는데 오후면 행복하지만, 오후인지 알았는데 오전이면 절망이다. 절망 방지뿐만 아니라 하루 업무 흐름을 파악하는데 좋다. 나는 주로 오전엔 기본적인 할 일에 집중하고, 업체에 연락하거나 타 부서 협조를 구하는데 쓴다. 오전에 바로 피드백이 오거나 오후에 오면 당일 안에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후는 보고서를 만들거나 정리하는데 사용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올빼미형이다보니 오후 시간에 집중이 잘 된다. 시간은 24시간 형식(1536, 1730 등)으로 적는데, 빠르게 파악하기 위해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시간 형식을 24시간으로 바꿨다.
하나의 업무를 처리한다. 품의 건을 적는 건 매달 하는 일이지만 계약서를 찾고 단가 및 수량을 확인하고 변동 사유를 파악하며, 전 단가와의 비교, 수급 현황 정리도 필요하다. 기본적인 일처럼 보이지만 수많은 잔일이 많기 때문에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그래서 내가 살이 안 찌나 보다. 일만 하면 살이 빠지는 나인데 찌는 사람들 보면 신기하다.
마치며
이런 저런 온갖 생각들이 삼라만상처럼 펼쳐지는 나의 두뇌를 뚫고 현존이 되어 메모장에 남겨진 글씨와 표시들,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서 나온 표현을 빌자면 영혼이 펜을 타고 내려와 글씨가 된 것이다. 소중한 나의 자산이고 기억이다. 비록 회사라는 장소가 던져주는 답답함과 스트레스가 담긴 표식이지만 내가 선택한 내 삶의 일부다. 부정하지 않고 긍정할 수 있도록 하자. 말은 이렇게 하지만 긍정이 잘 안될 때가 종종 있다.
노트의 '오늘 할일'을 보고 소대장의 지령을 받은 군인처럼 당당한 눈빛으로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고, 양손은 호기롭게 화이트 간지의 VORTEX WHITE 적축 기계식 키보드로 향한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하루의 전쟁은 어떻게 펼쳐나갈까 고민하는 장군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일을 해내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보병처럼 부지런하게 걷듯이 손이든 머리든 움직여야 한다. Go Go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