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로 회사 생활 격파하기
키보드와 마우스를 통해 만들어진 보고서나 결재문서, 메일이 개인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회사에서 나는 메모를 한다. 언뜻 보기에 나의 메모는 그냥 낙서 같은 느낌이 들고, 보기에 부담스럽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나도 그렇게 느끼는데 안 적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럼 나는 왜 메모를 할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할까? 메모를 하면서 여유가 날 때 생각해본다. 다시 또 생각의 바다로 다이빙한다. 잠수부가 된다.
잊기 위해 적는다
나는 왜 적는가? 잊기 위해 적는다. 메모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내용이다. 적어 놓으면 잊어버려도 된다. 어딘가에 적혀 있을거란 안도감이 '혹시나 잊어버린게 없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나를 꺼내주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A라는 업무를 하면서 B, C, D라는 업무가 계속해서 떠오르면 업무의 집중도가 낮아지고 결과물의 퀄리티가 낮아진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싱글 태스킹만 가능하다. 멀티 태스킹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적고 나서 잊어버리면 된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지만 더 잘 찾아보려면 마킹이 필요하다. (빨간색, 파란색, 형광펜)
그리고 자주 찾아볼만한 정보는 라벨을 붙여 놓는걸 추천한다. 3M에서 나온 얇은 책갈피를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주로 결제 조건에 대해서 묻는 업체가 많기 때문에 해당 정보가 있는 메모장은 책갈피를 꽂아 놓는다. 주기적으로 찾게 되는 페이지는 그렇게 해두는게 자신의 시간과 메모에 대한 만족도를 높이는데 좋다. 아니면 에버노트에 아카이빙 해놓고 검색으로 찾는 방법도 한가지 방법이다. 자신에게 편한 방법으로 하면 된다.
언젠가는 필요하다
굳이 그런 것까지 적어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는 데이터 (퍼센트, 상품코드, 대화에서 나온 단순한 통계 등)들도 적어 놓으면 언젠가 필요할 수 있다. 항상 필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본 사람의 경험상 다시 찾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업무 범위가 어디 가겠는가? 특히 전화로 했던 대화에서 적은 메모 수치가 보고에 요긴하게 쓰이는 경우가 많다.
어느날, 적진인 생산 본부에 서류 전달하고 오려는데 누가 나를 부른다. 업무에 관련된 얘기를 한다. 극도의 불안감이 나를 엄습한다. 메모장도, 볼펜도, 스마트폰도 없다. 이럴 땐 포스트잇을 빌린다. 후배라면 메신저로 정리해서 나한테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노트는 들고 있는데 볼펜을 안들고 간 경우, 리필심을 다 써서 떨어진 경우도 있었다. 이럴 땐 부득이하게 스마트폰 에버노트 어플에 메모한다.
자신은 믿어도 자신의 뇌는 믿지 말라. 에빙하우스 망각곡선을 한번 검색해서 보면 인간의 기억력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없어지는지 알 수 있다. 독서할 때를 떠올려보라. 오른쪽 페이지를 읽는데 왼쪽 페이지 내용이 하나도 기억 안난다. 믿을건 기록밖에 없다. 언젠간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적어놓으면 뿌듯하다. 미래에 일어날지 말지 고민하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전화벨이 울리고
점심 시간이 다가온다. 회사에서의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갈까? 항상 시간에 쫓기는 자까 대리는 회사에서 시간이 안간다는 사람은 일이 없어서 그런거라고 푸념을 하면서 일을 하나씩 처리해나간다.
'또리리링~ 또리리링~'
전화벨이 울린다. 누군지 본다.
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영업팀 과장이다.
전화기를 들기 전에 노트부터 세팅하고 펜을 든다. 이 사람과 진행되고 있는 혹은 진행될만한 나의 일이 뭐가 있나? 하면서 이메일을 뒤져본다. 이메일도 없으면 업무협조전이 있는 그룹웨어로 간다.
의식의 흐름은 순식간에 흘러가고 나의 손을 전화기를 향한다.
'반갑습니다. 자까 대리입니다.'
'자까 대리, 이전에 내가 말한 수입건은 어떻게 돼 가고 있어?'
'그 건은 현재 쉬퍼의 상품 준비 지연으로 선적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8월 쯤 선적 가능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당신이 확인해봐도 되잖아)
'그래? 그건은 빨리 푸시해주고, 이전에 들어온 건이 왜 그렇게 부대비가 많이 나왔지?'
부대비는 내가 챙길 항목이 아니다.
'그 건은 물류팀에 문의해보시는게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관세는 너네 팀에서 챙기잖아'
'맞습니다. 관세는 8%로 입력 돼 있네요, 실제로도 그렇게 들어왔고요' - (ERP 및 메일에서 확인)
'그래? 근데 왤케 많이 나왔지?'
'아무래도 물류비 쪽에서 예상하셨던 운임보다 높게 나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LCL건의 경우 FCL보다 많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 - (이전에 받은 FCL LCL 운임 비교, 내 일은 아닌데 궁금해서 받은 적 있음)
'그래? 알겠다. 물류팀이랑 확인해볼게'
'네 수고하십시오' (오늘은 무사히 넘어가네)
니네들이 예상을 잘못하고 진행한 걸 왜 나보고 물어보는지 묻고 싶다. 실제 업무는 항상 예상과 다르게 흘러갈 때가 많다.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항상 문제는 있게 마련이고, 재발방지 대책과 개선방향을 찾는 것이 회사에서의 일도 그렇고 인생도 같다. 하지만 개인적 삶은 회사 업무적 태도로 응하기 어려운 것 같다. 문제를 풀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많기에 곪아 터질 때까지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고 경험적으로 느낀다. 회사일이든 개인일이든 뭐가 문젠지 확인하고 예상대로 가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예방이 최고, 안되면 대응책을 제대로 세우는게 필요하다.
그렇다면 메모의 단점은?
업무 증가
메모를 해두면 까먹지 않는다. 할일을 빨간색으로 적어두면 할일이 넘쳐난다. 이 페이지에도 할일이 두세개, 저기도 있다.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경우 쌓인다. 이 같은 일은 주간 계획으로 넘어가서 거기서 처리된다. 한 주에 끝나지 않는 일들은 연기되서 다음주로 넘어간다. 이런 일들의 향연, 내가 알아서 챙길 일, 상부에서 시키는 일 등이 끊임없이 늘어난다. 보고를 하면 일이 2-3개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메모를 제대로 하지 않을 땐 대답만 하고 까먹는 경우도 많았고, 일부러 까먹는 경우도 있었다.
메모를 하고 나니 절대 까먹지 않는다. 일부러 미루지 않는 이상은 하게 된다. 부서의 특성상 문제가 있는 아이템의 경우에는 일이 끝이 없을 정도로 많다. 이렇게 늘어난 일에 대해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과중한 업무 로드로 이어질 수 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지만, 성격상 더 좋아질 수 있는 일은 뭐든 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하게 된다. 그래서 안 적는 사람들이 느끼지 않을 죄책감을 적는 사람들은 느끼게 된다. 기억력이 아무리 좋아도 까먹는 경우는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기억하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다. 나의 사수가 그런 편이다. 그러면서도 기억력은 나보다 좋다. 그런 그를 보면 부럽지만 데이터베이스적 측면에선 내가 우리회사 최강이다란 믿음을 갖고 있기에 부럽지 않다. 자존을 이런 업무 시스템에서 가지려고 노력한다.
다시 장점으로
업무의 고도화
고도화는 업무에서 보다 많은 걸 챙기면서 관리도가 올라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많은 걸 챙기지 않고 고도화 하려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데 이건 돈이 든다. 회사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돈들어가는거다. 고도화엔 보다 많은 데이터 입력이 필요하고, 다양한 소스에서 끌어온 데이터가 통합되서 이전보다 높은 관리도를 요구하게 된다. 개인의 에너지와 시간은 한정적인데 업무는 계속 고도화되면 그만큼 로드가 걸린다. 메모라는 촘촘한 그물을 통해 걸리는 업무가 많아지면서 성과는 늘어나지만 그만큼 그물 손질과 갖고 다녀야 하는 그물 자체의 무게가 늘어난다.
'아놔, 그냥 적기만 하고 장점을 보는 것도 충분할건데, 너는 왜 단점까지 생각하니?' 이러면서 피곤한 나 자신을 발견한다. 지식근로자 중에서도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는 의미 파인더는 이런 나를 좋아하면서도 피곤해한다.
따질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전에는 흐릿한 기억력으로 말싸움 하면 항상 졌다. 이젠 안진다. 따진다. 날짜, 시간까지는 너무 비정하니 얘기하지 않는다. 보여줄게 예전과 달라진 나.
'저번에 이렇게 하기로 했잖아 자까 대리'
'몇월 초에 이렇게 얘기하셨는데요 과장님'
'내가 그랬나?'
'네 여기 적혀 있습니다'
수입건 입항 7/18 긴급 입고 by 또라이 과장 (실제로 또라이라고 적혀 있진 않다, 보여주면 큰일남)
'아...'
후훗~ 나는 메모를 적고 그게 누가 말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누가 말했는지 꼭 적어 둔다. 이런식으로 by 를 잘 활용한다. 책 제목 적을 때 많이 활용하는 방식인데 업무협조전에 대해 에버노트 아카이빙 할 때도 by 결재자나 상신한 사람 이름을 꼭 적어둔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다. 나중에 회의편에서 다루겠지만 누가 어떤 발언을 했는지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이전엔 근거 없이 얘기했던 논쟁과 토론이 이제는 증거를 가진 것이 되기 때문에, 상대방도 나를 허투로 보지 않는다. 그 말은 업무 능력이 올라간다는 말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업무 능력을 이렇게 잘 올려서 무엇하냐는 생각도 들긴한다. 업무적 성장과 개인의 인간적 성장은 다른 분야란 생각이 든다. 진정으로 인간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건 꼭 회사 밖에서 추구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다시 메모로 돌아오면,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가진 내공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장점이 있다.
감정을 메모하라
메모에 대해서 할 얘기가 더 없을까? 고민하면서 노트한 내용을 훑는다. 볼펜으로 막 지워져 있는 곳이 보인다. 아무래도 앞의 내용으로 짐작컨대 욕을 적어 놨을 것 같다. 이 업무에 관련된 에버노트 노트를 찾아본다.
깨달음
- 삽질은 줄이려면 이전 업무 자료 참고
- 신입사원의 싸가지엔 싸가지로, 잊지 말자 (XXX 사원)
음... 이 인간이 이렇게 했었지? 내가 비록 이 일 때문에 너에게 일부러 해코지를 하거나 냉담하게 굴진 않겠지만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용서는 하겠는데 잊지는 않겠다.
이런 찌질한 업무 처리에 대한 단상도 적어 놓는다. 싸가지 없는 후임에 대한 단상. 잊지 말지어다. 갚아주겠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잊지는 말자. 우리 조상님들이 일제시대에 점령 당해서 당한 수모, 그리고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에게 한 잔인한 행동과 말로 못한 수탈,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용서란 진정한 복수이며 개인적 감정의 건강함을 지키기 위한 깨지지 않는 방어막이 된다. 내 감정을 잊지 말자.
그리고 부정적 정서가 우리에게 보다 큰 인상을 남기고 기억에도 오래 남지만 좋은 감정도 적어둔다. 어떤 일을 이루고 나서 느꼈던 좋은 성취감과 그 당시의 느낌을 몸으로는 표현 못하더라도 글로 적어둔다. 잘못한 일은 그렇게 잘 찾아내는데, 잘한 일은 왜 찾기가 힘들까? 프레임의 차이다. 잘한 일도 잘못한 일에 비견할 만큼 많을 것이다. 구분하는 역치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필터링 되는 잘한 일, 잘 못한일이 갈리는 것이다.
내 감정을 기록하고, 그것을 보살피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직장에서도 내 감정은 희노애락애오욕을 넘나든다. 회사 외적인 부분에서만 내 감정을 챙긴다는 건 말이 안된다. 회사에서도 내 소중한 감정들을 잘 보존하고 기록하자. 다시 보게 되면 업무나 기분에 관련된 많은 단서를 얻을 수 있고, 이건 타인에 대한 판단과 나 자신에 대한 공부가 될 것이다.
메모편을 마치며
오늘도 나는 메모를 한다. 볼펜심이 떨어지고, 노트의 흰 공간이 다 사라질 때까지 나는 적어 나간다. 적어 나간다는 것은 나에겐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행위다. 휘발적인 모든 것에 대한 반란으로 나는 메모를 한다. 업무에서도 나는 살아있어야 하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문자화 된 나의 업무와 생각은 나의 삶의 부분이다. 스트레스 받으며 일한 흔적이기도 하지만 이후에 보면 당시의 스트레스는는 사라진 채, 그리스인 조르바의 춤처럼 진리를 담은 움직임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나의 삶의 움직임, 뇌의 움직임, 나는 끊임없이 적어 나갈 것이다. 손에 펜을 쥘 수 없는 날이 온다면 그게 나의 정신적 사망일이 아닐까 이따금 생각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나는 적는다. 펜이 있는 한, 키보드가 있는 한 나는 적는다.
당시엔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의미를 담은 하나의 문장, 문구로 나에게 다가오길 기대한다.
메모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