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서막 : 쉬었다 감의 미학
"술도 조금 마셨고, 너 취한 채로 집에 들어가면 안 되니깐 쉬었다 가자"
늦은 밤 거리를 헤매다 보면 택시 앞이나, 다양한 숙박 업소 앞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며 다투는 남녀를 쉽게 볼 수 있다. 쉬어 가는 게 남녀 사이에만 필요할까? 나는 회사와 직원의 관계에서 같이 쉬진 않더라도 혼자라도 쉬었다 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회사가 장기적으로 운영하는 데엔 직원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일은 직원이 하는 것 아닌가? 회사라는 시스템은 기계이고, 개인은 그 기계의 연료이다. 기름도 한번씩 쉴 때가 필요하다. 오늘은 직원의 쉬었다 갈 권리인 연차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고자 한다.
연차의 시작은 보고에서부터
12월 연말을 앞둔 금요일, 갑자기 쉬고 싶어졌다. 점심 시간에 팀원들이랑 밥 먹으러 나가면서 말했다.
"팀장님, 저 월요일 하루 쉬겠습니다"
"어디 가는데?"
25일에 쉬고, 31일엔 일하는걸로 회사 정책적으로 결정됐다. 나는 25일은 정책적으로 쉬고, 31일 날은 개인적으로 쉬고 싶었다. 연차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사실 말한 날 오전까지도 고민했으나 말을 던지고 난 후, 나의 마음은 쉬는 쪽으로 굳어졌다. 일단 반려를 당했으나 차로 이동하는 내내 팀장에게 연차 떡밥을 던졌다. 점심 먹을 때까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연차 : 라운드 Two
그렇다고 쉽게 포기해선 안 된다. 길이 나아가기 위해 있는 것처럼, 연차도 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차의 적절한 존재 시점은 내가 쓰고 싶은 시점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조금 시간이 지나고, 팀장의 머릿 속에서 연차라는 단어가 희미해졌을 즈음 업무 보고하면서 다시 말할 기회를 살폈다. 일단 업무 보고로 혼을 빼놓고 나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업무 보고를 하려고 하는지 알았나 보다. 이제 다 확인했다고 하는데 한번 더 미사일을 날린다.
"팀장님, 31일에 하루 쉬겠습니다"
"안 된다고 했잖아"
"31일은 연차로 쉬겠다는 겁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쉬고 싶습니다"
이렇게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업무 진행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안 되겠지만 쉬고 싶을 때 쉬어줘야 한다. 왜냐하면 그냥 그런 날이 있다. 올해 연차를 거의 못 썼다. 그리고 31일에 쉬면 4일 연달아 쉴 수 있다. 토, 일, 월, 화(신정)까지 연달아 쉴 수 있는 찬스이고, 2018년 동안 나는 라라랜드의 삼류 밴드가 연주한 "I Run"처럼 열심히 달려왔고, 한 해를 돌아보고 쉴 시간이 필요했다.
"할 일 없어?"
"지금 걸려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할 일 없냐는 말에 욱했으나 참았다. '연차 달성'이라는 더 큰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밀린 일이 있더라도 연차를 썼을 때 터지지 않으면 된다. 터질 만큼 일을 미루는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에 별 일이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생각보다 매도벽이 쉽게 뚫리지 않는다. 심장이 덜컥한다.
돌아가더라도 목적지는 하나
"원래 내일 치과 가려고 했는데 재고 조사 때문에 못 갑니다. 그래서 31일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조퇴라도 해야겠는데요"
"끙... 알겠다"
하이패스처럼 보내주는 팀장도 있을테고, 우리 팀장처럼 아닌 경우도 있을 테다. 조폭 사이의 싸움에도 명분이 필요하듯, 팀장에게도 나의 휴가를 허락할 명분이 필요하다. 사실 팀장이 결재권자이긴 하지만 내 연차를 결정 지을 권한이 그에게 있는 건 아니다. 법적으로 보장 받은 나의 권리이고, 중요한 건 시기의 문제이다. 당신이 알아서 쉬라고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쉬고 싶을 때 알아서 쉬어야 한다.
쉬고 싶을 때 쉬자
처음엔 그냥 쉰다고 하고 안되면 다른 플랜을 들이밀자. 사실 연차엔 이유가 없어야 한다. 내가 하나 실수한 건, 바로 전 날 말한 것이다. 스무스하게 쉬려면 2-3일 전에는 말하는 게 필요하다. 당신이 쉬고 싶을 때 쉬는 게 연차의 본질이다. 못 쉬는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미움받을 용기는 책 제목에서만 유효한 게 아니다. 당신의 존재는 회사에서 영원하지 않고,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연차는 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