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간의 휴가, 그리고 회고

by 록록록

회사가 경영난을 빌미로 더이상 남은 연차를 소급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담 연차를 다 사용하는 것이 인지상정? 남은 9개의 연차를 탈탈 털고 나니 나에겐 무려 2주라는 시간이 내게 당도했다.


나- 제주도 갈까?

남편- 굳이 돈 아깝게. 집 근처 내륙이나 가.


지난 4월 제주에서 보낸 한 달 남짓의 달콤한 시간이 그리워 제안했더니 싸늘히 돌아오는 남편의 대답. 돈이 아깝기도 한데 이 시간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않나.


그렇게 어찌저찌 3일이 가고, 실상 영업일 기준 7일만 남은 내 시간이 어쩐지 초조하다. 마음 속엔 그러니까 제주도 가자고 했지.. 라는 꽁한 한구석이 남아있지만 연말의 제주는 비싸긴 하다. 젊음의 피로 바로 항공권 예매하고 숙소 예약하고 떠나기엔 우리에겐 20개월 아기가 존재하니 언감생심이다.


아기가 잠깐 잠든 고요의 시간. 올 한 해를 돌이켜본다. 아기를 낳고 다시 돌아간 일터. 아기를 등에 업고 뛰는 레이스는 얘기가 달랐다. 턱끝까지 차오르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 그만둔다 선언했었고 내가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얼 위해서 어린 생명을 두고 내가 이 고생을 하는지 내 자신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처할 수 밖에 없는 경력단절이 여성 개인의 문제라 치부했다. 개인이 약하기 때문에, 일을 이어갈 의지가 없기 때문에 경력을 포기하는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갓 돌이 지난 아기를 놓고 나와보니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였다. 경력단절로 유도하고 있는 주위의 시선과 사회의 제도 때문이었다.


나 또한 그 길을 걸을 뻔했다. 나를 잡아준 선배의 정성스런 말이 아니였다면 나 또한 그 굴레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전 글 참고) 똑같은 좌절의 상황에서 여성에겐 포기라는 선택권이 더욱 쉽게 주어진다고 한다. 이어나갈 수 없게, 유리천장에서 스스로 돌아설 수밖에 없도록.


난 늘 그렇게 해야만하는, 납득이 되지않는 상황을 납득해야만 하는게 싫었다. 엄마가 평생 보지도 못한 조상의 제사상을 차리는 일,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커피를 타와야 하는 일, 공손해야 하는 일, 조신한 척 해야하는 일이 싫다. 나는 그저 여성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써 권리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 유별난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찍혀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회의 시선에 맞서고 싶다. 그저 그렇게, 좋은게 좋은거라는 명목하에 내 안의 목소리를 숨기며 살아가고 싶지 않다.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도, 내가 글을 계속 쓰는 이유도, 내 안의 목소리를 일깨워 작게나마 외치고 싶다. 어쩔 수 없이 안주하게 된 친구, 후배, 선배 모두에게 우리의 잘못이 아니니 우리 함께 '나아가자' 라고 북돋고 싶다.


향수 가게에서 머물기만 해도 우리에겐 향수의 아름다운 향이 남아있다. 좋은 환경,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곁에 있다면 나도 자연스레 그들을 닮아간다. 난 늘 좋은 사람을 만나길 갈망한다. 나를 바꿔줄 사람, 나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줄 사람을 갈망한다. 하지만 그런 귀인은 살아가며 한 번이라도 만난다면 그건 행운이다. 기다리지 않고,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아기를 키우고, 일을하고, 집안일을 하느라 시간의 빈틈이 거의 없는건 사실이다. 그 시간을 쪼개고 쪼개면 그 빈틈 속에도 무언가 생긴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고, 그 마음은 체력에서 나온다. 내년에도 올해처럼 체력과 정신력을 잃지 않고 무사히 정진할 수 있길, 빼곡한 시간의 틈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길. 보통의 일상이 제일 감사함을 잊지 않고 고요 속에 삶이 흘러가길 진정으로 염원해본다.


제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께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올 한 해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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