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김밥’하면 내 눈물버튼, 신근지>

그날 우리의 김밥은 조금 특별했다.

by 보배

아빠와 심하게 다툰 날 엄마는 끝내 집을 나갔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말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을 추수 때 모은 곡식과 김장해 놓은 것들로 아빠와 오 형제는 그 해 겨울을 났다. 봄이 오고 우리에게는 봄소풍이 찾아오고 있었다. 소풍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은 점심시간이고 김밥일 것이다. 햄, 맛살, 단무지, 시금치나 오이, 당근이 들어가서 색도 예쁘고 맛도 좋은 김밥을 말이다.

그 해 우리의 김밥은 특별했다. 중학생인 큰언니는 생활비와 차비를 아껴 읍내 슈퍼에 들렀으리라. 그리고 분홍소시지와 계란 몇 알을 샀을 것이다. 단무지 대신 겨우내 항아리에서 익어간 신근지로 하기로 했다. 오래 두고 먹기 위해 소금을 많이 넣었을 신근지를 물에 깨끗하게 씻고 꾹꾹 짰다.

그날 밤 깜빡이는 형광등 아래 자매들은 밤늦게 김밥을 쌌다. 저마다 한 마디씩을 거들며 싸다 보니 김밥은 제법 모양을 갖추었다. 한알이라도 더 넣기 위해 꽁지만 겨우 맛보고 우리는 잠이 들었다. 내일은 소풍이다. 김치뿐인 도시락 말고 나도 김밥 도시락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부푼 기대를 안고서 말이다.

다음 날 산 정상에 오른 학생들은 점심시간이 되자 하나둘씩 도시락을 꺼냈다. 나도 자리를 잡고 은색 스테인리스 도시락을 열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 무의 군내가 싸악 퍼졌다. 어린 나이에도 이건 아니다 싶어 얼른 뚜껑을 닫고 아이들이 없는 나무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열어보니 세상에! 신근지국물이 김을 녹여 너덜너덜해진 김밥이 있었다. 참기름 향은 어디로 가고, 분홍소시지와 계란의 맛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다 먹어야 한다. 우리가 어젯밤 정성 들여 쌌다. 이걸 만들기 위해 들어간 돈이 얼만데... 그리고 일단 배가 무지 고팠다.

집에 돌아와 두 살 많은 언니한테 물어보니 언니 김밥도 똑같았다고 했다. 그날 소풍 간 우리들끼리만 알고 큰언니한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언니가 가진 돈과 재주로 최대한 예쁘게 만들었을 텐데 알면 얼마나 속상해할지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다 먹었는지 기억도 안나는 그날의 김밥은 가끔씩 내 눈물 버튼이 된다. 다른 하늘 아래에서 고생했을 엄마도 생각나고, 엄마의 그늘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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