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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별 Oct 05. 2020

나도 남편 아이 집 다 있을 줄 알았지

밀레니얼 골드미스의 일과 사랑


아빠: "지난번 아빠 친구들끼리 모임 있었는데 먼저 나왔어."
나: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빠: "아빠 친구들은 손자 손녀 사진을 보여주는데 나는 없어서 재미도 없고 먼저 나왔어."


내 나이 36살. 아직 미혼.
결혼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임!


25살 때는 내가 28살이 되면 결혼해서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고 집도 있을 줄 알았다.

28살 되어서는 31살쯤 결혼해서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을 줄 알았다.

31살 되어서는 33살쯤 결혼해서 남편이 있을 줄 알았다.

33살 되어서는 36살엔 연애를 하고 있을 줄 알았다.

36살이 된 지금 나는 연애를 쉬고 있으며, 회사와 집을 오가며 열심히 일하는 '밀레니얼 골드미스'로 있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나는 일과 사랑 중에 계속해서 '일'을 택해왔다.


나는 투자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지리학도 였던 내가 투자업계에서 자리 잡기 위해선 열심히 하는 것 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참 징글징글하게 일에 빠져 있었다.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가 "내 전화는 안 받고 왜 회사 전화는 받아?"라며 서운함을 비췄을 정도니.


남자 친구의 서운함도 이해했지만 일 욕심 많던 나는 여기서 조금만 더 성장하면, 조금만 더 올라가면 더 멋있는 커리어우먼이 될 거라는 생각에 일을 놓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전 직장에서 세 번을 쓰러지고, 번 아웃으로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생각할 때 즈음 나는 32번째 생일선물로 퇴사를 결정했다. 정말 쉬고 싶었다.

나는 이직까지 3개월의 여유가 생겼다. 첫 번째 달은 건강 회복하는데 시간을 보냈고, 두 번째 달은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세 번째 달은 더 놀아야 하는데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일중독이었던 나는 일하는 게 더 익숙하고 편했었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 시간을 잘 즐기지 못했다 살짝 아쉽다.


그리고 지금의 직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마음으로 다짐했다.

다시는 온몸을 다 바쳐서 일하지 않을 거야.
적당히 일하고 연애도 하면서 내 인생 즐길 거야.


하지만 책임감 강한 그 성격이 어딜 가겠나.

나는 내가 들어간 부서가 신설되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세팅해야만 하는 환경에 놓였고, 경력직이라는 부담과 책임감을 안고 다시 열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경험이 쌓이다 보니 전보다는 업무가 수월했다.

하지만 '첫 빠따'는 역시나 힘들다. 모든 걸 새롭게 만들어야 하니 업무는 전보다 배가 되는데 진행하고 있는 일도 함께 해야 하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나는 다시 '연애'보다 지금 당장의 '일'이 더 중요해졌다. 그렇게 4년이 흘렀고, 부서 사람들도 늘어났다. 중간중간 연애는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현재 나는 일에 있어서는 참 많이 성장했다. 펀드 및 경영관리에 10년의 경력이 생겼다. 업(業)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쌓였고, 직책이 오르면서 연봉도 오르고 아래 직원이 생기면서 업무량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연애에 있어서는 더 어려워지게 되었다. 괜찮은 남자들은 이미 결혼을 했고, 나의 이상형에 대한 기준은 전보다 높아졌다. 이왕 늦은 거 억울하지 않게 진짜 괜찮은 남자를 만나야겠다는 욕심도 생겼다. 

게다가 이젠 설렘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30대 중반 이후로는 남자 친구와  헤어져도 슬프거나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헤어진 당일에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었다. 20대 첫사랑과 헤어질 땐 한 달 동안 밥도 못 먹고 매일 울었던 거 생각하면 내 감정이 많이 무뎌진 건 맞다.

그리고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결혼에 그리 아쉬운 상황이 아닌 게 되었다. 회사에서도 인정받고 있고, 경제적인 여유도 생겼다. 무엇보다도 누구를 챙겨야 하거나 누구에게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움에 익숙해져 있었다. 기혼자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자유'를 결혼으로 인해 멈출 이유가 없는 거다.




그런데 두둥!!!

얼마 전 나는 갑작스럽게 수술을 하게 되면서 결혼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나이 들어서 아플 때 나를 병원에 데려다 줄 사람이 필요하겠구나


퇴원 후 부모님 댁에서 수술 회복을 하면서 부모님이 서로 의지하며 알콩달콩 사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한테 과일 깎는 걸 시키기 위해 "아빠처럼 껍질을 한번 도 안 끊고 과일 잘 깎는 사람 없다"라며 무한 칭찬하는 엄마의 슬기로움이 보였고, 그 말을 듣고 신나서 예쁘게 과일을 깎는 아빠의 귀여움을 발견했다.

아빠 등에 뾰루지 같은 게 나서 약을 발라야 하는데 엄마와 내가 밥을 먹고 있으니 지나가는 말로 "오늘은 등에 약 못 바르고 가겠네~"라고 툭 던지는 아빠의 말에 "이리 와~ 약 발라줄게"라고 얘기하는 엄마 아빠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에 부부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일에만 빠져 이런 알콩달콩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연애에 대해서도 감정 낭비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컸고, 결혼도 내 자유를 빼앗아 가는 것으로만 치부했었다. 그런데 결혼이 주는 안정감이 있었다.



이젠 일과 사랑에 대한 발란스를 맞출 차례다


나는 내년 MBA에 진학 준비를 할 정도로 아직 일에 대한 성장 욕심이 크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일과 사랑의 비중이 90: 10이었다면 이젠 50:50으로 변화를 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일이 주는 행복도 있지만 사랑을 통해서 얻는 행복과 안정감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설렘이라는 감정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 찌릿찌릿~


MBA에 다니는 선배들을 만나 얘길 들어보니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남녀 비율이 70:30이고, 경력직이라 30대 중후반이 많은데 여자들은 한 두 명 빼고 미혼이더라.
아마 OO 씨 거기 가면 동일한 골드미스들 많이 만날 거야. 다들 일 욕심 많은 친구들이더라고.
아! 그리고 동기 중에 거기서 연애하는 친구도 생기더라고. 다들 그 친구들이 진정한 Winner라고 하고 있어. 학위도 받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약속하고. 하하"


나는 갑자기 MBA에 또 다른 동기부여가 생기기 시작했다. MBA 꼭 가야겠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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