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이 된 너에게
박혜란 저 | 토트출판사 | 2024년 08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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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생의 전환점에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과 고민을 솔직하게 담아낸 책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50대 경험을 바탕으로, 시간이 지나며 달라지는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며, 나이듦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시합니다.
50세라는 나이는 단순히 삶의 중간 지점이 아닌, 인생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길을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임을 강조하며, 저자는 독자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려 노력합니다. 나이가 들면서도 새롭게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 책 속에 문장 중 영감을 주는 일부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펴내는 말 : 나도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
“저도 올해 50입니다.” 설날 아침. 세배를 하고 난 후 큰아들이 말했다. 조금은 덤덤하게, 조금은 먹먹하게. 잠깐 사이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솟아났다.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내 자식이 어느새 이렇게 나이를 먹다니. 인생 참 순간이구나. 아니, 자식이 벌써 50이면 그 부모인 내 나이는 도대체 얼마라는 거야.
솔직히 의심쩍긴 하지만 애써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믿고 살려고 해왔는데… 와우, 이렇게 한방에 깨지네. 그런데 괘씸하다. 나이란 놈, 이미 나이 먹는 데 도통한 나한테 꼬박꼬박 들어오면 됐지 왜 젊은 애한테까지 기를 쓰고 찾아 들어가는 거야. 못됐네.
뒤돌아보면 그동안 겪어 왔던 모든 나이대가 다 나름의 의미가 있었겠지만 50이라는 나이는 내게 여러 모로 각별했던 것 같다.
지난 40년 동안 다양한 활동을 통해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그중 대부분은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모들이었다. 초기에 만났던 이들은 주로 3,40대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연령대가 10년 이상 높아지는 게 확연히 보였다. 사회가 급변함에 따라 결혼도 늦어지고 출산도 자꾸 늦어져 가는 탓이다. 3,40대에 결혼하면 50이 되어도 아이들이 아직 초중고에 다니는 경우가 많다.
사회의 중추라는 위치에 선 그들도 사는 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보다 훨씬 앞서 살아간 내가 단지 아이들 교육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대해 도움말을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이가 50쯤 되면 생활도 안정되고 마음도 느긋해질 줄 알았는데 정작 50이 되고 보니 오히려 가슴이 콱 막혀 오는 기분이라고 한다.
열심히 달려온 것 같은데 돌아보니 이룬 것도 하나 없고 자신은 늙었는데 아이는 아직 한참 어리고 앞길은 너무 멀고 험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50이 되기 전에 일자리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흔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평생 생활이 보장된 의대를 강요하게 된다고 서글퍼하고 자신은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안 나온다고 하소연한다.
그렇다. 50대에 들어선 그들이 내게 원하는 건 속이 뻥 뚫리도록 명쾌한 해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단지 인생 선배로부터 공감과 위로를 얻고 싶은 마음뿐일지도. 이 험한 세상에서 참 열심히 살아왔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 앞으로도 잘 될 거야, 나도 그랬어, 그냥 비틀대면서 용케 여기까지 걸어왔어라는, 어쩌면 들으나마나한 밋밋한 말들. 그런데 어쩐지 듣고 나면 듣기 전보다 마음이 편안하고 든든해지는 삼시 세끼 같은 말들 말이다.
Part 1 인생에는 공짜도 없고 헛수고도 없다
참 쉽게 흔들리는 행복
내가 늘 행복하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아직도 욕심 때문에 마음이 부글거릴 때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늘 ‘내 주제에 이만하면 과분하지’라며 가진 것에 고마워하다가도 어느 날 불쑥 내가 더 가질 수 있는데 억울하게 놓친 것 같아서 앙앙불락할 때가 있다. 바로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이 눈에 들어올 때다. 그럴 때면 내가 가진 것은 안 보이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만 크게 보인다. 남과 비교하는 순간 나의 행복은 사라져 버린다. 행복은 바깥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속에 있다는 간단명료한 진리를 잊는 순간이다.
‘남’ 부러울 것 없는 삶
도대체 ‘남 부러울 것 없다’고 할 때 그 ‘남’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 한 친구를 따라잡으면 더 잘사는 다른 친구가 떠오르고 그 친구를 따라잡았다 싶으면 또 더 잘사는 친구가 떠오른다. 기준을 남에게 두는 한 내가 따라잡아야 할 ‘남’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한다. 결국 나는 남을 부러워하느라 내 삶을 놓치고 만다.
외로움을 즐길 것 혼자 놀 줄 안다는 건 외로움을 즐길 줄 안다는 뜻이다. 외로움을 즐길 수 있다면 남에게 섭섭함 따위를 느낄 겨를이 없다. 섭섭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늘 여유로워 보여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오늘, 난생처음 살아보는 날
내가 사는 오늘 하루하루가 난생처음 맞는 날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무언가 새로운 이벤트가 없으면 사는 게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다. 일흔이 넘어서야 일상의 새로움을 다시 느끼고 있다니 참 어리석기도 하다. 난생처음 살아 보는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된다.
잘 산다는 것
잘 산다는 것은 선두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 속에 숨어 있는 힘을 최대한 끌어내 그것을 키우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이다. 남보다 앞선다는 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냥 뚜벅뚜벅 내 길을 걸어가면 그것으로 됐다.
완벽한 셈은 없다
젊은이들이여, 너무 셈을 앞세우지 마라. 어차피 인생은 셈한 대로 풀리지 않을뿐더러 완벽한 셈은 어디에도 없는 법이니까. 지금 이익이라고 생각해 봤자 나중에 손해일 수도 있고 지금 손해인 것만 같은데 결국은 이익으로 돌아올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다.
Part 2 이 시간은 바람처럼 지나갈 테니
나만의 엄마 노릇
내 아이를 다른 집 아이와 비교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자신을 다른 엄마와 비교할 필요도 없다. 다른 엄마는 그 엄마의 아이를 키우는 거고 나는 내 아이를 키우는 거다. 다른 엄마에 비하면 나는 어느 정도의 엄마일까 점수 매기지 말고 스스로 내 아이의 맞춤형 엄마가 되면 그것으로 됐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런 엄마. 나만의 엄마노릇을 해내는 것, 그것도 창의력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크는 존재다
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너희들이 나한테 손님으로 와 줘서 너무 고맙다’라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사는 수많은 부모들 가운데서 바로 나에게, 이처럼 못나고,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욕심 많고, 심술 많고, 그러면서 잘난 척하고 게으른 그런 엄마한테 와 주어서 너무 고맙다. 아이들을 내 새끼가 아니라 우연히 나한테 온 고마운 손님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손님으로 봐야 쓸데없는 간섭을 안 하게 되니까 말이다. 나는 아이들이 나름의 완성된 어떤 미래를 자기 안에 갖고 태어난다고 보고, 아이들이 크는 과정은 그것이 바깥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아이는 키워지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크는 존재라고 굳게 믿는다.
아이는 나의 분신이 아니다
현재의 내가 불만족스러울수록 아이에 대한 기대가 커진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실망이 커져 가면 원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아이는 나의 분신이 아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을 그들에게 기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면 된다.
정말로 무조건 사랑하는가?
부모라면 누구나 아이를 무조건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곰곰 생각해 보자. 정말로 무조건 사랑하는 게 맞을까? 혹시 아이가 내 마음에 들 때만, 나를 즐겁게 해줄 때만 사랑하는 건 아닐까? 공부를 잘 하니까, 말 잘 듣고 착하게 구니까 사랑하는 건 아닐까? 아이가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를 화나게 만들어도, 공부를 못해도, 말을 안 듣고 못되게 굴어도 나는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무조건적인 사랑을 퍼부어야 아이는 포만감을 느낀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받아들이자. 아이가 부족하면 그만큼 부모가 채우면 된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고 부모 자신을 키우는 것이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언젠가는 떠나갈 손님
나는 아이들을 간섭하지 않은 엄마가 아니라 아이들을 간섭하지 못한 엄마였을지 모르겠다. 나는 애초부터 아이들을 언젠가는 떠나갈 손님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어려운 손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주인이 없듯이, 아이들을 손님으로 본다면 어떤 엄마가 감히 아이들을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 할까. ‘자식을 손님처럼.’
쿨하면서도 따뜻하게 좋은 가족 관계란 무엇일까. 사춘기 때부터 할머니가 된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는 좋은 가족 관계란 ‘쿨하면서도 따뜻한 관계’다. 너무 부담없이 지내다가 상처를 주고받지 말고 서로 지킬 것은 지키되 최대한 서로 보살피고 베푸는 관계. 너무 끈끈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그리운 관계.
Part 3 도대체 왜, 내가 저 사람이랑 결혼한 거지?
사소한 일로 자꾸 싸워야
이 나이까지 티격태격하면서 사는 내가 한심하다가도 그나마 싸우면서 살았으니까 이만큼이라도 산 게 아닐까 하고 스스로 위로한다. ‘사소한 일로 자꾸 싸워야 큰 싸움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그도 나처럼 외로운 존재
인간은 어차피 외로운 존재다. 연인이 그 외로움을 달래 주는 데 특효약인 건 사실이지만 약효는 늘 시한부일 뿐이다. 특별히 소통이 잘 되는 남편이라면 외로움 퇴치에 큰 힘이 되겠지만 그 역시 외로움을 완치시킬 명의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도 결국은 나처럼 외로운 존재이니까.
사이좋게 해로하는 법(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젊었을 때 착실히 돈을 모아 놓아라. 피차 지나친 관심을 끊어라. 집안일은 사이좋게 나눠라. 서로 손님으로 대접하라. 측은지심으로 살자. 따로 또 함께 하자.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
Part 4 지나간 나이는 항상 젊다
나이든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나도 모르는 새 부쩍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무렵부터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적어도 나이든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나이들어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도 마흔을 넘고 쉰을 넘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착각
나이라는 게 그렇다. 자신보다 10년 어린 사람과 자신은 아무 차이가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반면, 자신보다 10년 위인 사람은 한 세대 위처럼 늙게 생각된다. “그 연세에…”라는 말에 거품을 물고 덤비는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나도 입 밖으로 토해 내지만 않았다 뿐이지 나보다 열 살은커녕 다섯 살만 많아도 마음속으론 나하곤 다른 세대로 밀어낼 때가 많다. 반면 10년 이상 아래인 사람들과는 전혀 세대차를 못 느낄 정도로 잘 어울린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이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착각이라니!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 자기를 중심으로 젊음과 늙음을 가른다. 물론 자기 자신은 항상 젊은 축으로 본다.
너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남긴 아픔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일상은 금세 되풀이되었지만 그 아픔은 불쑥불쑥 되살아나 나를 각성시켰다. 자, 너도 곧 죽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요즘 우리 또래의 화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모아진다. 모두들 아프지 않고 ‘자는 듯이 죽고 싶다’는 소망을 털어놓는다.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중환자실 침대에서 숨을 멎고 싶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예로부터 인간의 이 소망은 신이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건방진 것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자는 듯이 죽는, 모두의 소망인 ‘편안한 죽음’은 현실에선 아주 드물다.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이면 모를까.
아쉬운 듯할 때는 언제?
모두들 말한다. 너무 오래 살아도 나중이 문제이니 적당할 때 떠나고 싶다고. 그럼 도대체 적당한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아쉬운 듯할 때’라고 답한다. 재미있는 건 그 ‘아쉬운 듯’한 시간이 입장에 따라 너무 다르다는 사실이다. 오래 전 어느 대학에서 ‘부모님이 떠나셔도 아쉽지 않은 나이’에 대한 조사를 했더니 ‘62세’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20대 입장에선 너무 당연한 답을 두고 40대는 허허 웃고, 60대는 민망해하고 80대는 분기탱천했다는 썰.
노후생활이란 말은 없다
산다는 것은 늙어 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늙음이란 젊음이 스타가토로 끝나는 어느 날 별개의 삶처럼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기를 쓰고 늙음을 밀어내려고 애쓴다. 마지못해 늙음 이후의 생활을 예비하면서. 하지만 늙음 이후의 생활, 즉 노후생활이 어떻게 따로 있을 수 있는가. 노전생활이란 말이 없는 것처럼 노후생활이란 말도 틀린 말이다. 우리는 그저 계속 늙어 가고 있을 뿐이다.
지나간 나이는 항상 젊다. 나이듦이란 것은 개인적인 일이며 동시에 사회적인 일이다.
나이 드니 좋은 점
나이가 들고 몸이 약해진다는 게 반드시 나쁘기만 한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한복판으로 뚫고 들어가 치열하게 사는 대신 멀찌감치 물러나서 조용히 구경만 해도 뒤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좋다. 또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건성으로가 아니라 진짜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서 좋다.
남은 자의 삶은 지속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을 떠나가도 남은 자의 삶은 지속된다. 왜 사느냐는 물음은 필요 없다.
그냥 살아가는 것일 뿐.
어느 순간 느닷없이 죽음과 마주친다 누구나 죽는다. 모든 인간은 시한부 환자다. 그러나 또 모두들 애써 그 사실을 잊는다. 그리곤 자신만은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마구 써버린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나와 더불어 영원히 살리라고 믿으면서 마구 대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느닷없이 죽음과 마주친다. 나의 죽음 혹은 타인의 죽음과 대면해서야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과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죽음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향해서
인간은 결국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자 늙어 가고 그 깨달음을 안고 죽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인간은 어쩌면 죽음이라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마지막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다고 볼 수도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