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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노트

독서노트 : 나는 포기를 모른다(5)

5장. 삶이 달라지면 기어를 바꿔라

by CalmBeforeStorm

나는 포기를 모른다

아놀드 슈워제네거 저 / 정지현 | 현대지성| 2024년 08월 23일


https://m.yes24.com/Goods/Detail/130704793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책 “나는 포기를 모른다”(원서 Be Useful : Seven tools for life) 는 그의 삶을 통해 끊임없는 자기 혁신과 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자서전적 저서입니다. 이민자로서 미국에 건너온 아놀드는 보디빌딩 챔피언, 할리우드 배우, 성공한 사업가, 환경 운동가,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놀라운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성공은 단순한 운이 아니라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끝없는 노력과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결과입니다.


특히 이 책에서는 “포기하지 않는 자세”가 인생의 가장 큰 성공 요인으로 등장합니다. 아놀드는 자신의 삶에서 마주한 수많은 난관과 실패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그 과정을 통해 더 강해졌다고 설명합니다. 고난이 있을 때마다 그는 이를 극복하는 것을 즐겼고, 그 덕분에 더 큰 성취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책의 독자에게 영감을 주며, 독자 스스로를 돌아보고 독려하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자기계발과 성취를 꿈꾸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 책의 내용중에 인상 깊은 문장이나 문구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 분량이 많은 관계로 나누어 업로드하겠습니다.



5장 삶이 달라지면 기어를 바꿔라


나는 공개적으로 발언하거나 지도자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우선 그 자리에 있어본 경험이 있어서, 위기 상황에서는 해결책이 아무리 명확해 보여도 겉보기와는 달리 훨씬 복잡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내 원칙 때문이다. 상황을 개선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절대 불평하지 않는다는 원칙 말이다. 눈앞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은 채 상황이 안 좋다고 투덜거리기만 하는 소리는 듣기 싫다.


그 문제가 당신에게 해결하고자 하는 동기를 주지 못했다면, 사실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불평한다고 목표에 가까이 다가갔던 적이 있던가? 꿈은 열심히 움직이고 노력해서 이루는 것이지, 불평으로 이루는 게 아니다. 게다가 문제와 역경은 지극히 평범한 삶의 일부다. 당신의 비전이 무엇이든 앞으로 고난의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당신을 힘들게 하고 죽도록 괴롭히는 일들이 생길 것이다. 그 순간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어를 바꿔 긍정적인 면을 찾는 법을 익혀야 한다. 실패를 재구성하고 현재의 리스크를 이해해야 한다. 가만히 앉아 불평하는 게 아니라 문제와 똑바로 맞서야 이 모든 기술을 연습할 기회가 생긴다. 마스크 부족 사태 때 나도 기어를 바꿨다. 파티오에서 뉴스를 보며 룰루와 위스키(내 당나귀와 미니어처 말)에게 투덜거리고 하소연하는 것에서, 무능한 정치인들이 자초한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말이다. 기어를 전환하면 지금 내가 있는 인생 단계에서 품은 비전을 실행할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능한 한 많은 이를 돕는 것 말이다.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아내는 거대 물류 회사에서 일했다. “사람들을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부인에게 물어봐 주시겠어요?”라고 했다. 그날 오후 연락이 왔다. 놀랍게도 물류 회사 플렉스포트Flexport는 이미 방역 최전선 지원 펀드Frontline Responders Fund라는 모금 운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누군가와 협력하고 있었다. 플렉스포트 대표들은 그 기금에 돈을 냈지만, 중국발 수백만 장의 마스크와 다른 개인보호장비를 기다리는 중이니 내가 동참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했다.


관건은 우리가 몇백만 장을 살 것인가였다. 처음 든 생각은 이랬다. 대통령은 물론 주지사, 상원의원들까지 모두 이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 있지? 최소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불평할 때가 아니었다. 정부의 무능에 대한 좌절감이 해법 모색에 방해가 되어선 안 되니까.



기어를 바꾸고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라

비교적 최근에서야 사회과학자들은 인간이 긍정보다 부정에 더 강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명확히 밝혀냈다. 우리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이미지와 뉴스 기사를 더 자주 클릭한다. 긍정적 결과를 바라는 것보다 부정적 결과를 우려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심지어 긍정 감정보다 부정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 훨씬 더 많다.


이런 현상을 ‘부정성 편향’negativity bias이라고 하는데, 과학자들은 이것이 우리의 생존 메커니즘일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을 다치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즐거운 경험에만 집중했다면 조상들은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600만 년 동안 우리는 긍정적인 영향보다 부정적인 영향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했다. 그러나 오늘날 더는 예전처럼 유용하지 않은 편향이 많은데 이 부정성 편향도 그중 하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부정성 편향의 존재 이유가 이해는 간다. 하지만 솔직히 내 삶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부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건 그야말로 시간 낭비일 뿐이다. 나는 단순히 살아남고 싶은 게 아니라 성공하고 번영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당신도 그러길 바란다. 성공하려면 어떤 상황이든 수용하고 시각을 전환해 긍정적인 부분을 찾으려 애써야 한다.


만약 내가 긍정적이지 않았다면, 오스트리아에서 보낸 힘들었던 어린 시절에 내가 다르게 반응했다면, 지금의 내 삶이 얼마나 달라졌을지 종종 생각한다. 어릴 때 집에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았고 10대에 육군에 입대하고 나서야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어린 날의 아침은 물 길어오기와 장작 패기로 시작됐다. 특히 겨울엔 더더욱 고달팠지만 아버지는 내 고충을 전혀 알아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가혹했으니까. 구스타프 슈워제네거의 집에는 공짜가 없었다. 식사조차 공짜로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침을 ‘벌기’ 위해 매일 아침 무릎 굽혀 펴기 200개를 해야 했다.


빈속에 제자리 뛰기를 쉴 새 없이 하니 얼마나 입맛이 돌았겠는가. 이런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생활과 고된 노동으로 어린 내 영혼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잡지와 뉴스 영화에서 본 미국은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나라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을 테다. 지평선 너머를 상상조차 못 할 수도 있었다. 어릴 적 오스트리아 남동부 시골 마을을 벗어난 인생을 꿈꾸는 게 가능하다고 어떤 격려도 받지 못한 건 사실이다.


제대 후엔 경찰이라는 제법 괜찮은 직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와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은 그저 운이 좋아서라고 여겼을 것이다. 아버지는 보디빌딩에 대한 내 관심을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장작이나 패라. 이것만 해도 크고 강해질 수 있다. 장작 패는 건 가족들에게 도움되기라도 하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우리를 때렸다. 그런 날은 정말이지 더더욱 힘들었다.


어린 시절의 역경에 굴복하고 무너질 수도 있었지만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내 선택은 늘 그랬다. 아버지가 좋으신 분일 때도 많고 어머니는 최고라고 받아들였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결코 들뜨거나 편안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괜찮은 삶이었다.


많은 것을 배웠고 열정과 목표, 첫 멘토들을 만났으니까. 내 어린 시절에 안 좋은 일이 많았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 덕분에 현실을 뛰어넘어 더 큰 것을 성취하고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 만약 내 어린 시절이 좀 더 안락했다면 당신이 이 책을 읽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그 시절이 좀 더 혹독했어도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으리라. 나는 어릴 적 많은 빚을 졌다. 지금의 내가 된 건 그 시간 덕분이고, 그 시간에 의해 나라는 인생이 만들어졌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스토아 철학에는 이에 꼭 들어맞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말이 있다.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이다. 노예 출신의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네가 바라는 대로 일어나길 요구하지 말고 실제로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니체 또한 같은 주제를 다뤘다. “인간의 위대함을 향한 나의 공식은 아모르 파티다.
그가 다른 것이 되길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필연적인 것을 그저 견디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눈앞의 역경이나 불쾌함을 마주하면서도 “그래, 이건 내게 꼭 필요했어. 내가 원했던 거야. 정말 좋아”라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역설적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부정성 편향은 세상의 모든 나쁜 일을 끌어당길 뿐 아니라, 나쁜 일이 닥쳤을 때 도망치고 부정하고 외면하고 싶어 한다. 그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앉아서 불평할 뿐이다. 대부분이 그렇다. 큰 시련은 물론 일상의 사소한 악재에도 그런 식으로 반응한다.


나쁜 상황에 처해 불평하고 한탄하고 싶은 충동이 일면 나는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며 스스로에게 말한다. 기어를 바꿀 때라고. 실제로 소리 내어 말한다. 이 상황에서 긍정적인 면을 봐야 한다고 말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은 말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통제할 수 없지만, 일어난 일에 어떻게 느끼고 반응할지는 통제할 수 있다.”


한번 생각해보자. 자신이 좌우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불평하며 낭비하는 시간이 일주일에 얼마나 되는가? 예측하거나 막을 수 없는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며 보내는 시간은 또 얼마인가? 자신과 무관하고 짜증만 유발하는 기사나 소셜 미디어 게시물을 읽는 데 쓰는 시간은? 꽉 막힌 도로에서 치민 분노를 사무실이나 교실, 집까지 가져간 적이 몇 번이나 되는가?


앞서 말했듯 빽빽한 하루를 보내고 남은 귀한 시간을 아껴 자신의 비전 실현에 써야 한다. 그런데 부정적인 것들에 굴복하는 순간, 그것은 당신과 당신의 꿈, 가족, 학교 운동부, 직장 프로젝트팀, 부서 등 당신이 이끌어야 할 사람들에게서 목표 달성에 사용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빼앗아간다. 그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 용도를 바꿀 수 있다.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부정적 상황을 긍정적 경험으로 전환할 수 있다.


불평이 고개를 들 때마다, 기어를 바꾸고 긍정적인 점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질투 대신 기쁨을, 증오 대신 행복을, 앙심 대신 사랑을, 부정 대신 긍정을 택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게 해주는 강력한 도구를 손에 넣게 되는 셈이다. 실패로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실패를 재구성하라

어딜 가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놀드, 스스로 정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했어요.” “이번 주에 승진에서 미끄러졌어요. 이제 어떡하죠?” 그때마다 내 대답은 단순하다. 실수에서 배우고 다시 돌아가라는 것“I’ll be back.”. 대부분에겐 그 조언으로 충분하다. 다소 겁이 나거나 막막해 보여도 약간의 격려만으로도 도전의 길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삶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부족한 노력 탓에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차마 직시할 용기가 없어서다. 그냥 추측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나도 겪어봤다.

1968년 프랭크 제인에게 졌을 때 나는 크게 절망하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날 밤 호텔 방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미국까지 와서 뭘 하는 건지 회의감마저 들었다. 가족과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말이다. 마이애미에서는 아는 이도 한 명 없이 완전히 혼자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지? 나보다 근육량도 적은 선수에게 밀려 2등이나 할 거라면.’ 나는 우승하지 못한 이유를 남 탓으로 돌리기 바빴다. ‘심사위원들이 불공정했어, 미국인인 프랭크에게 유리하게 편파 판정을 내렸어, 며칠 전 미국행 도중 런던 공항에서 먹은 불량식품이 몸과 훈련에 나쁜 영향을 끼친 거야….’ 패배의 충격이 너무 커서 거울을 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내가 부족해서 우승 못 한 거라는 생각에 자책감이 들었다.


분명히 일러둘 게 있다. 실패를 겪어본 이들, 한마디로 세상 모든 이에게 하는 말이다. 실패는 치명적이지 않다. 너무 흔한 말인 건 안다. 하지만 실패에 관한 긍정적 이야기는 진부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절대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을 해내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은 모두 성공보다 실패에서 더 많이 배웠다고 말할 것이다. 실패가 끝이 아니라고 역설할 것이다.


정말 맞는 말이다. 올바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실패야말로 가늠할 수 있는 성공의 출발점임을 깨닫게 된다. 실패는 오직 어렵고 가치 있는 일에 도전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실패는 목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작성해야 하는 일종의 진행 보고서 같은 것이다.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아직 갈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러준다. 실패는 실수에서 교훈을 얻고 접근법을 다듬어 발전시켜 훨씬 나은 상태로 재도전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기회다.


나는 다른 많은 교훈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 역도 대회 출전을 위해 체육관에서 훈련하면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 역도의 묘미는 실패가 훈련의 기본이자 핵심 요소라는 점에 있다. 사람들이 자주 잊곤 하지만, 역도의 목표 자체가 실패할 때까지 근육을 단련하는 것이다.


마지막 횟수를 채우려 남은 힘을 쥐어짜도 안 될 때, 중량을 들어 올렸지만 팔꿈치를 완전히 펴기도 전에 힘이 빠질 때, 좌절하기 쉽다. 하지만 이걸 실패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근육이 더는 들 수 없을 때까지 운동을 제대로 잘해냈다는 뜻이다. 이런 게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체육관에서 실패는 패배가 아니라 성공과 동일하다. 그래서 나는 늘 마음 편하게 한계에 도전한다. 무언가를 이루려 애쓰는 과정에서 실패가 이처럼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능력의 한계를 시험해보려고 할 것이다.


영어를 배울 때도, 대작 영화에 출연할 때도, 중대한 사회 정책을 다룰 때도 말이다. 결국 한계에 다다랐음을 인지한 순간, 이제는 그 한계를 뛰어넘어 성장하면 된다. 그러려면 실패의 위험을 끊임없이 감수하며 자신을 시험해야 한다.


사실 여러모로 실패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비전 달성에 있어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실패가 아니라 포기다. 실패는 꿈을 죽이지 않지만, 포기하는 순간 그 어떤 꿈이든 죽는다.


세계 신기록을 세우거나 기업을 성공시키거나 비디오 게임에서 고득점을 올리거나, 그 무엇이든 매우 어렵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해낸 이들은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수없이 실패를 겪으며 지금의 자리에 올라섰다.

실패를 견디고 실패가 주는 교훈에 귀 기울인 덕분에 업계 최고가 되고 세상을 바꾼 제품을 발명하고 남들이 모두 불가능하다 말렸던 획기적인 비전을 실현했다.


금속 세척제 WD-40을 발명한 화학자를 예로 들어보자. WD-40은 ‘수분 제거 40번째 공식’Water Displacement, 40th formula의 약어다. 그는 39번째 공식이 실패했기 때문에 연구 일지에 그다음 도전을 WD-40이라고 불렀다. 매번 실패로부터 배운 교훈으로 40번째 도전에서는 결국 성공을 거뒀다.


토머스 에디슨은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것으로는 가히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실패를 실패라 부르는 것조차 거부했다. 1890년대 에디슨과 그의 팀은 니켈-철 전지 발명에 매진했다. 약 6개월 동안 9,000개가 넘는 시제품을 만들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조수가 성과가 전혀 없어 유감이라 말하자 에디슨이 대답했다. “유감이라니, 성과가 이렇게 많은데! 효과 없는 방법을 수천 가지나 찾아냈잖아.” 이것이 과학자로서, 발명가이자 사업가로서 에디슨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에디슨이 그로부터 약 10년 전 전구를 발명할 수 있었던 것도, 생을 마칠 때까지 1,000건이 넘는 특허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러한 긍정적 사고방식, 실패의 훌륭한 재구성 덕분이었다.



규칙을 어겨라

거대한 비전을 추구할 때는 반발과 저항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비전 없는 사람은 비전 있는 사람에게 위협을 느낀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두 손을 들고 “안 돼! 잠깐, 서두르지 마”라고 외치고 싶어 한다. 전형적인 회의론자들이 으레 그러듯 그들은 도전 자체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새로운 발상을 두려워하고, 거대한 프로젝트에 현기증을 느끼며, 기존의 틀을 깨고 새 물결을 일으키려는 이들을 불편해한다. 이유가 뭐든 토 다는 걸 자제하고 기존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선호한다. 나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아마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 인생은 늘 남다른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었다. 보디빌더 시절엔 다른 선수들처럼 하루에 한 번이 아닌 두 번 운동했고, 배우가 되어서는 TV 드라마나 영화 단역부터 시작하라는 PD들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오직 주연만 노렸다. 정치인으로선 시의원, 시장, 주 상원 출마를 순서대로 해보라는 당 대표나 정계 실력자들의 말을 건너 뛰고 바로 주지사에 도전했다.


내 비전은 처음엔 최고의 보디빌더가 되는 것이었고, 다음엔 최고의 영화배우였으며, 그다음엔 최대한 많은 이를 돕는 것이었다. 그것도 ‘언젠가 기회가 오면’이 아니라 ‘가능한 한 빨리’ 말이다.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타고 맨 아래서부터 천천히 올라가거나, 큰 목표에 도전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기까지 기다리는 건 내 계획에 없었다. 당연히 기득권층이나 현상 유지를 바라는 이들은 그런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나는 그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새 물결을 일으키려는 내 의지보다 그들에게 더 눈엣가시가 된 것은 남이 나를 시기하든 말든 불평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나의 태도였다.


주지사로 일할 때 특히 심했다. 새크라멘토에서 나는 많은 규칙을 깼는데, 그런 내게 가장 불쾌감을 드러낸 것은 오히려 같은 당 사람들이었다. 내가 민주당 소속 수잔 케네디를 비서실장으로 고용하자 그들은 마치 내가 여우를 닭장에 들이기라도 한 듯 반응했다. 한 공화당 의원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사무실을 찾아와 내 의자 옆 소파에 앉더니, 음모를 꾸미는 만화 속 악당마냥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속삭였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것 같은데 수잔이 레즈비언이라고… 마치 경고라도 하듯이 말이다. 물론,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위험을 내 편으로 인식하는 방법

위험 감수가 두렵다면 —나 역시 깊이 공감한다— 실패와 마찬가지로 위험을 재구성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엔 위험은 실체가 없다. 만질 수 있는 실물이 아니다. 사람마다 위험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위험은 늘 변하는 과녁 같고, 만들어진 개념이다. 한마디로 인식의 산물이다. 위험이란 그저 우리 각자가 어떤 선택의 성공과 실패 가능성을 저울질한 뒤 내린 결론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고 실패 결과가 매우 부정적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위험한 선택이라 결론 내린다. 반면 성공 가능성이 높고 실패해도 치명적 대가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너무나 진부하다. 실패 위험뿐 아니라 성공의 긍정적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이득이 별로 크지 않다면 위험이 아무리 작아도 감수할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꿈이 그러하듯, 이득이 크다면 아무리 큰 위험도 무릅쓸 만하다. 현실적으로 사람은 간절히 원하고 자신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면 위험이 크든 말든 개의치 않고 성공을 향해 돌진하게 마련이다.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나 삶의 진리다. 위험이 클수록 보상도 커진다.


내가 위험을 가늠할 때 던지는 질문도 그것이다. 내가 잃을 것은 무엇인가? 원래 위험에 대한 내성이 강하고 남들이 가망 없거나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들을 이토록 많이 해낼 수 있었던 이유도, 젊은 시절 나는 잃을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성공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할 때마다 실패의 폐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 이야기했으니 한번 상상해보라.


그때 내가 그라츠 체육관에서 온종일 근육을 키우고, 그 후 뮌헨으로 가서 생판 낯선 체육관에서 일하다 마침내 미국행을 감행하기까지 그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잃을 게 뭐가 있었겠는가? 영화배우에 도전해 잃을 건 또 뭐가 있었을까? 설령 연기력이 처참해서 캐스팅 제의가 끊겨도 난 여전히 7회 미스터 올림피아 타이틀을 거머쥔 보디빌더로 역사에 남을 터였다. 게다가 내 편에는 조 웨이더가 있고 보디빌딩 서적도 팔 수 있고 마련해둔 집도 있으니 근심이 없었다.


정치에 입문해서 잃을 건 또 무엇이었을까? 주지사 선거에 떨어지고, TV 토론회에서 망신을 당해도 여전히 스릴 넘치는 도전을 즐기는 인기 스타로 남아 있을 터였다. 떨어져도 부와 명성은 그대로이고 스페셜 올림픽이나 애프터스쿨 올스타즈 같은 의미 있는 활동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도전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간 쌓아온 명성이 추락했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이루려는 목표에 대한 타인의 눈초리를 신경 썼다면 그랬을 것이다.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고 꿈을 좇았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내게 중요한 건 오직 보디빌딩 대회 심사위원들, 영화 관객들, 투표하는 유권자들을 만족시키는 것뿐이었다.


혹시나 그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거나 실패하고 패배해도 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다. 보디빌딩이든 연기든 정치든, 매번 실패할 때마다 원점으로 돌아가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해 매진했고, 기어이 더 강해져서 돌아왔다. 이걸 과연 위험 감수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역경을 뚫고 나아가려 할 때 직면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또 실패해서 효과 없는 방법을 하나 더 알게 된다는 것뿐이다. 그 순간 기어가 전환될 것이다. 이제 바른 방향으로 향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으니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셈이다. 이래도 과연 잃을 게 있기는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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