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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쨌든 Apr 09. 2020

묵은 쇠고기와 좀 나은 돼지고기

고속 성장 시대 중산층 음식 자서전 11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나의 학창시절, 우리 가족은 일주일에 한번씩 고기를 구워먹었다. 거의 한 주의 의례처럼, 주로 주말 저녁에, 식탁 가운데 전기 프라이팬을 올리고 요즘으로 치면 대패 삼겹 비슷한 꽁꽁 언 얇은 고기 조각들을 즉석에서 구워먹었다. 


단, 그 시절엔 삼겹살이라는 게 없었고 고기는 기름이 거의 없는 부위를 먹었다. 아마 기름은 정육 과정에서 떼내어 더 값싼, 다른 용도로 사용했을 것이다. 엄마랑 정육점 갔을 때, 기름을 좀 더 떼고 달라고 정육점 아저씨랑 옥신각신 하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식탁에서 직접 구워, 참기름과 소금과 후추에 찍어 먹는 먹는 고기 구이를 그때는 ‘로스 구이’라고 불렀다. 요즘은 뭐라고 부를까? 이제는 해외에도 널리 퍼진, 전형적인 Korean BBQ라기엔 직화는 아니었으니까… 하긴, 요즘도 적당한 명칭은 없는 것 같다. 우리가 ‘고기’를 먹으러 간다라고 하면 그건 바로 양념 없이 썰려 나와 식탁에서 직접 구워 양념장에 찍어 상추와 함께 먹는 고기 즉석 구이를 의미하니까 말이다. 즉 그 요리의 이름은 ‘고기’인 것이다.


예전에 우리 집에서 구워 먹던 고기는 크게 ‘쇠고기’와 ‘돼지고기’로 나뉘었다. 가격차는 그다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쇠고기는 수입 고기였고 거무튀튀한 색깔에 냄새가 많이 났다. 국산인 돼지고기에서도 역시 특유의 누린내가 났지만 색깔은 이상하지 않았고 맛도 쇠고기보다 나았다. 아마 그 당시는 거세라든지 하는 축산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서 웅취가 좀 났던 것이리라.


그리고 또 지금 생각하면 그때 쇠고기는 요즘처럼 항공 냉장 운송되는 게 아니었다. 배로 수입된, 즉 해로로 몇달에 걸쳐 냉동 상태로 운송된 고기가 아니나 싶다. 우리 식구는 쇠고기 구이가 식탁에 오르는 날엔 많이 먹지 못하고 남기곤 했다. 냄새도 낫지만 맛도 정말 없었다. 


그러다가 돼지고기가 오르는 날엔 꽤 많이 먹었다. “엄마, 우린 돼지고기가 더 맛있는 것 같아. 앞으론 돼지고기만 먹자.” 하고 말했더니 엄마는 “원래 엄마는 쇠고기를 더 좋아하는데... “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쇠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그 고기를 좋아하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지금이야 매끼 식사를 하면서 고기를 안 먹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보통 간단히 식사를 할 때 반찬에 고기가 들어가는 일이 드물었다. ‘고기 반찬’이란 ‘특별한 식사’와 동일한 의미였다. 그래도 우리가 그다지 가난한 가족은 아니었으니까,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고기를 풍족히 먹어서 가족들 체력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알뜰한 우리 엄마가 국산 한우 쇠고기를 일주일에 한 번씩 사기는 무리였다.


그러고 나서 이십여 년이 흘러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사태가 터졌다. 한국 사회가 들끓으며 음식 문제로 인한 최초의 대규모 시민 집회가 확산되었다. 그런 어수선한 와중에, 나의 엄마아빠는 이모네 식구와 함께 외식을 하자고 했다. 엄마가 우리를 부른 곳은 위성도시의 어느 소내장탕 집이었다. 음식점에 들어가 보니 떡하니 미국산 쇠고기를 쓴다고 고시가 돼 있었고 손님은 한산했다. 생글거리는 우리 엄마아빠와 달리 이모네 부부는 우거지상을 하고 앉아 있었다.


“어차피 광우병은 10년은 지나야 발병한다며? 그때는 우린 죽은 뒤일 테니까!” 아빠는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곰탕에서 커다란 뼈를 건져 골수를 쪽쪽 빨아먹었다. 이모네와 우리 자매는 차마 뭐라고 말은 못하고 찝찝한 얼굴로, 곰탕에서 살코기만 건져 끼적끼적 먹었다. 


그로부터 10년이 훨씬 지났지만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건강하다. 뿐만 아니라 요즘엔 누구도 미국산 쇠고기를 배척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10여년 전의 그 난리법석은 그냥 거대한 호들갑, 헛소동이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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