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 성장 시대 중산층 음식 자서전 10
나 어릴적, 학교도 들어가기 전, 찌는 듯한 여름이면, 엄마는 우리 자매를 며칠씩 어딘가에 맡겼다. 외할머니댁에 한 번, 사촌의 외갓집에 한 번 간 기억이 난다.
미국영화나 유럽영화를 보면 부모가 아이를 여름캠프에 맡기고 자기들은 로맨틱한 바캉스를 다녀오던데, 나의 부모는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여름을 핑계로 아이들에게 다른 동네 체험도 시키고 본인들도 며칠 좀 호젓하게 쉬고 싶었던 것이리라. 당시는 2박3일 이상 휴가나 여행을 가던 때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 여름에 나와 동생은 개성아줌마 집으로 가게 됐다. 개성아줌마는 우리에게 큰고모 같은 존재로, 원래 수녀였다. 수사였던 나의 아버지와 수도원에서 알게 되었고, 두 분 다 비슷한 문제로 수도원을 나오게 되면서, 이후 계속 교류하며 지내게 된 것 같다. 다만 나의 아버지는 나의 엄마와 결혼을 했고, 아버지보다 열살 가량 많았던 개성아줌마는 이후로도 독신으로 살았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분은 개성 출신의 이북 사람이었다. 두어달에 한 번씩 우리 집을 방문하며 나와 동생에게 멋진 선물도 사주는 개성아줌마를, 우리는 무척 따랐다. 지금 생각하면, 월남한 실향민 출신에, 평생을 의탁할 것으로 예상했을 수도원까지 나이가 꽤 든 후 나오게 된 분이니, 우리 가족을 가족처럼 삼고 의지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와 동생도 자식처럼, 손주처럼 귀여워해주었고 말이다.
엄마에게 개성아줌마네 집에서 며칠 자고 오라는 말을 들은 날부터, 나랑 동생은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우리를 얼마나 예뻐해주는 아줌마인데, 장난감도 많이 사줄 텐데, 얼마나 재밌게 보낼까 하면서 말이다.
막상 도착한 개성아줌마의 집은 많이 허름했다. 아줌마는 동작동 국립묘지 바로 뒤의 비좁은 셋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국립묘지로 매일 산책 가기는 편리했지만 먹을 것을 사러 시장을 가거나 시내에 나가기 위해 버스를 타려면 비탈진 골목길을 한참 구불구불 올라가야 했다.
무엇보다 그해 여름은 무척 더웠고, 아줌마의 좁은 집은 어른 한 명과 아이 둘이 지내기에 많이 답답했다. 아줌마는 우리 자매가 머무는 내내 “에이, 덥다. 올해 여름은 왜 이리 덥니.”를 연발하며 짜증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주눅이 들어 말없이 앉아 땀만 송송 뿜어냈다.
혼자 소박하게 살아온 중년 독신녀의 정갈한 셋방에, 꼬마 둘이 며칠씩 눌러앉게 되었으니, 아줌마는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국립묘지로 소풍을 가서, 묘지들 가장자리로 자라난 무성한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피해 보려 했지만, 그해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을 제대로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가 어느날 집에서, 그 더위에도 불구하고 아줌마는 팔을 걷어붙이고 밀가루 봉지를 열었다. 진짜 맛있는 개성식 만두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땀을 비오듯 쏟으며 만두피 반죽을 시작했다. 만두피는 익숙한 것보다 조금 두껍게 만들었다.
그리고 만두 속을 만들었는데, 좀 이상했다. 엄마가 해주던 것처럼 두부나 김치를 넣지 않고, 오로지 돼지고기 간 것과 부추만으로 만두 속을 만들었다. 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 나이였으면서 내가 ‘저러면 너무 느끼할 텐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마침내 수증기를 무럭무럭 뿜으며 쪄낸 만두에서는 돼지고기 냄새가 강하게 올라왔다. 열기에 습기에 냄새까지 더해져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만두를 입에 넣었다가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그렇게 기름진 음식은 처음 먹어보았으니까.
지금이야 온갖 종류의 기름진 음식을 먹어온 터라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 같다. 실제로 이국적인 중국 음식점에서 돼지고기와 부추만으로 만들어진 만두도 먹어보고서 ‘색다르다’는 평가를 내놨던 적이 있다. 오늘날 외국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는 나의 음식 취향에는 이런 어린 날의 경험도 한몫 했을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