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쨌든 Mar 03. 2020

가사 실습의 나박김치와 야채빵

고속 성장 시대 중산층 음식 자서전 9

저번에 글쓰기 모임에서, 어느 분이 초등학교 가사 실습 시간에 된장찌개 만든 이야기를 썼다. 그분은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누구는 쌀을 가져오고, 누구는 된장을 퍼오고, 누구는 집에서 냄비와 수저를 가져오는 등, 아이들의 업무 분담 정경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막상 쓰기 시작했더니 기억들이 막 떠오르더라고, 그분도 신기해했다.


심지어 실과(가사) 교과서에 된장찌개가 ‘토장국’이라고 명명돼 있었다는,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까지 기억해 써주어서, 마치 그때의 교과서 페이지가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은 글 읽기 체험이 되었다.


나도 가사 실습 시간의 추억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데, 그 정도의 기억은 안 난다. 그래도 ‘나박 김치’를 만들었다는 건 기억난다. 어디서 났는지 조그만 항아리가 몇 개 마련되었고 반 전체를 여덟 개 분단(조)으로 나누어 야채들을 썰기 시작했다. 담임교사가 “누구네 분단 김치가 제일 맛있는지 볼 거야~” 같은 말을 하면서 책걸상 사이를 돌아다녔다.


아무리 고학년이라도 초등학생이 ‘김치’를 만들기는 좀 이르지 않나… 지금도 그렇게 생각되고, 그 당시에도 어린 마음에 그런 걱정을 안고 실습을 시작했다. 근데 나박김치는 사실 김치 치고는 만들기가 쉬운 편이다. 어린 우리는 “생각보다 쉬운데?” 같은 의견을 나누면서 배추와 무를 네모나게 썰고 미나리를 짧게 자른 다음 양념 국물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항아리에 담아 하루 정도 그냥 두었다. 다음 날 점심 시간에 각 분단마다 항아리를 열어서 김치를 먹었는데, 시큼한 냄새를 풍기던 그 물김치를 어린이들 모두 너무 맛있다며 신나서 먹었다.


그후 중고등학교 때도 서너 번 가사 실습을 했다. 다른 때는 거의 아무 기억이 안 나는데, 유독 선명하게 기억에 남은 것은 고등학교 때 ‘야채빵’을 만들고 나서의 장면이다. 


레시피는 간단했다. 당근과 고구마 등 야채를 잘게 깍둑 썰고서 밀가루에 물과 함께 섞었다. 약간 된 반죽을 면포에 올리고 찜기에 쪘다. 요즘도 가끔 트럭 같은 데서 무럭무럭한 증기를 피우며 파는 노란 옥수수 찐빵과 비슷한 거였다.


나름 영양 만점의 야채빵을 만든다며 재료를 많이 넣었다. 건포도랑… 또 뭔가 잔뜩 넣었는데… 아무튼 기막힌 냄새를 풍기며 완성된 빵을 다들 맛있다며 와구와구 먹었다.


문제는 어느 정도 먹고 배가 찼을 때였다. 우리 학생들은 왠지 방금까지 맛있다며 먹은 야채빵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 무언가 너무 느끼하고 달았다. 설탕도 버터도 안 넣었는데 말이다. 아하, 그래서 문제였던 걸까?


아무튼 우리는 수업 종료 종이 울릴 때쯤이 되자, 남은 빵을 싸서 교실로 가져가거나 하지 않고 몽땅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서 교실을 빠져나가는데 뒤에서 가사 선생님의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 아까운 빵을 전부 버렸어?” 뒤돌아보니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우리는 나몰라라 우다다다 도망쳐 교실로 돌아왔다. 


이렇게 쓰고 보니, 배가 고파진다. 그때의 그 빵이 지금 눈앞에 있다면 정말 맛있게 먹을 것 같아서 침이 넘어간다. 그러고도 남는다면 소중하게 비닐에 싸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두고두고 감사히 먹을 것 같다. 그때 그시절 우리는 왜 야채빵을 버렸을까? 풍요에 물려버린 90년대라서 그랬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달고나 뽑기와 백화점 푸드코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