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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Aug 20. 2022

불혹에 나이가 되면

소중한 당신

 요즘 회사일로 무척이나 바빠졌다. 설계된 제품을 일정대로 출시해야 하는데, 출시 1주일 정도를 남겨 놓고 문제가 생겼다. 그것도 나로 인해 기인된 문제 말이다. 하루 평균 전화 60통, 메일은 120여 개, 단톡방에 문자는 수천 개에 육박한다. 평소보다 10배가량 급증한 업무량에 웃음이 나왔다. 지금이 힘들어서라기 보다, 남은 내 직장 생활이 이런 식으로 채워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듯했다. 그간 가졌던 안이함에 대한 대가라 하기엔 그 고통이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나이 40세는 불혹에 나이라 한다. 그 어떤 유혹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 해서 붙여진 이칭이다. 내가 이립(30세) 즈음에 불혹을 보던 시절, 그들은 거대한 존재였다. 존재 자체만으로 성숙했고, 외모와 지성까지 완벽했으니 말이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던 그날, 삶에 밑그림을 그리며 초안을 꾸미던 시절 나에게는 롤모델이 있었다. 일, 외모, 인격, 그리고 목소리마저도 완벽해 보였다. 어디를 봐도 한결같음에, 불혹이란 단어 그 자체가 가진 단단함에 힘을 믿었다.



지금 나는 불혹 즈음으로 진입하고 있다. 감정에 흔들림은 잦아들어야 하고, 일에 결과는 대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실패가 없음에 수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에도 기준이 서야 할 나이인 것이다. 물론 나도 사람이기에 실수란 것을 한다.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주저앉아 울어보기도, 웃어보기도 했다. 이런 인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누가 그러더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지금 몇 안되게 가지고 있는 페르소나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허덕이는 나에게, 불혹이 가져온 자리는 외적 모습보다 내적 자격을 다그친다. 삶에 무게를 느끼며, 나이가 숫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라 한다. 열매가 가진 과즙과 과육에 달콤함이 허투루 영글지 않았음을 말이다.



눈치 없이 울어대는 내선 전화 소리에 정신이 든다. 진정 울고 싶은 것은 너만이 아닐 테지. 전화를 받으며 한참을 거닐던 사유와 사색에 걸음을 현실로 돌릴 수 있었다. 웅성이는 소리에 주변을 돌아봤다.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 주기를 바라며, 사슴 같은 눈망울을 한 동료들에 속삭임이 들려왔다.


어쩌면,

만약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보고 누군가는 자신이 바래왔던 어떤 모습과 비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결자해지를 위해, 이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해보겠다며, 그간 모아둔 여벌에 책임감, 의지, 노력, 그리고 나 까지도 모두 넣고 갈아 넣어야 했다. 이런 모습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희생을 빙자한 생소함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그때, 나에 롤모델로 선정된 그분도, 문제가 있던 상황에서 발휘한 기지가 한결같았다. 분명 모두 힘들고, 지친 상태였지만 눈빛에서 만큼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에 의지로 넘쳐났으니. 벌써 10여 년 정도에 세월이 흘렀다. 가족이 아닌 이익집단에서 처음 가져본 경외심과, 존경심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이라는 것에 찌들어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삶이란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일에 보태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개인에 감정은 일을 함에 있어 거추장스러웠던지,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쳐 형체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는 먹기 싫다고 투정 부리고, 하기 싫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먹기 싫다고 투정 부리는 아이가 집에 있고, 그런 아이와 함께하는 와이프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가족 오락관이 아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무책임하게 돌려서는 안 되고, 설명이 어렵다고 패스를 외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좋은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왠지 기분이 묘해졌. 그간 꺼져가던 의지에 생기가 도듯했다. 측은이든, 동정든 존경이든 무엇이 되었든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리에서 내가 잘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니깐.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는 나에게 잘하고 있다고 다독여 봤다.

불혹에 나이라고 잘해야 하는 아니라,

끝까지 하려고 하는 것이 불혹이라고,,,



수화기를 내려놓고, 동료들에게 말을 하는 도중 떠오른 감정 몇 마리를 사로잡아 끄적여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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