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귀가 얇다.
누군가의 말을 쉽게 믿는다. 그 말이 거짓이든 아니든 적합성이나 타당성을 따져보고 믿으면 좋으련만, 일단 믿고 보는 순진함은 삶을 풀어감에 있어 어리숙함이나 착함으로 비치곤 했다.
귀가 얇은 사람은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던진 작은 돌멩이조차도 새로움을 갈망하는 대상으로 삼곤 했다. 평온했던 삶이 지속되는 것보다 소란이나 분주함을 가져다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만큼 오늘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고 실패도 성공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감각이 생기는 듯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똑같은 샴푸를 두 번 이상 구매해서 쓴 적이 없다. 다 쓸 때까지 써본 적도 없다. 매번 더 나은 제품을 찾기 위해 쇼핑몰이나 마트에 오와 열을 맞춰선 샴푸들 사이를 기웃거렸다. 라면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새로운 제품이 나왔으니 맛이나 한번 보자는 다짐은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번 새로운 라면을 선택하게 한다. 어쩌면 내가 마트에 가는 빈도보다 라면의 종류가 더 자주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든다. 나는 앞으로 같은 맛의 라면은 먹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새로움에 대한 갈증은 그만큼의 배설도 뒤따른다.
기대심이 큰 만큼 실망도 컸다. 실망에 대한 대상은 그 제품이 되어야 맞지만 나는 나를 탓했다. 나의 유별남과 나의 특이함을 핑계로 되려 제품을 옹호했다. 광고를 보며 확신했던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이 무너지면 안 되었기에 나를 희생하는 편이 수훨했다. 나의 부주의에 의한 실망은 그냥 흘리면 그만이지만 믿음은 틈이 생기면 안 되는 것이었다. 또 다른 기대 속에 두려움이 스며들 수 있기에
나는 지금에 와서야 귀가 얇다는 것에 회의감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껏 펄럭이며 살아온 귀가 탐탁지 않게 느껴진다. 돈도 돈이지만 진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면서도 이전 실망보다 낫다는 자기 최면도 이제는 효력이 떨어지나 보다.
하지만 이것 또한 나의 일부였다. 기대감에 부풀어 택배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도 나고, 누군가의 말을 듣고 당장의 내일을 희망으로 채워보는 것도 나였다. 비록 현실과 상상에 괴리가 생겨도 나의 어리숙함을 탓하며 또 다른 바람을 찾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귀가 얇은 사람일지 모르겠다.
남이 던져주는 삶의 분주함을 마음껏 누리고도
후회가 없는 사람이니
하늘은 스스로 지르는 자를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