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코끼리를 타든 말든

일기

by 눈 비 그리고 바람

"나도 2000cc 타는데 자네가 뭔데 2500cc SUV를 타지?"

"요즘 사원들은 생각이 없는 것인지 용기가 과한 것인지, 나 때는 눈치 보여서 걸어 다녔는데, 참 나"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 내가 들은 말이 저 사람 입에서 잘 못 나온 것인지, 내 귀가 잘 못 된 것인지 한참을 멍하게 서있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면박을 당해야 했다. 내일이면 마흔이 되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다부진 몸을 가진 팀장이 나를 쏘아보며 뱉은 말이었다.




대학교 졸업 직후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어딜 가도 선배라는 말만 들으며 고인물 취급을 당하던 나였지만 새로운 직장에서 지급받은 신입이라는 꼬리표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준 회사가 고마웠다. 그런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던지 나는 하루 15시간씩 일을 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조직이 원하는 틀에 맞춰 다시 주워 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제 야근 후 동기들과 마신 술이 문제였는지 늦잠을 잤다. 눈을 떠보니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원래 출근시간 1시간 전인 7시까지 출근해서 사무실 청소를 마치고 E-Mail을 읽고 정리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불속에서 후회만 하고 있었다. 앞이 깜깜했다. 외마디 탄식과 욕이 번갈아 나왔다. 샴푸로 거품을 낸 후 머리를 문지르고 흘러내리는 거품으로 얼굴과 온몸을 문질렀다. 아무렇게나 헹궜다. 어제 입은 옷이랑 그 전날 입은 옷의 냄새를 번갈아 맡았다. 그나마 냄새가 덜 나는 옷으로 골라 입고는 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내 차에 올라탔다.


얼마 전 8년이 넘은 쏘렌토를 중고로 샀다. 취업하고 처음으로 나를 위한 투자였다. 볼 때마다, 탈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오롯이 내 것이고 내 공간이었기에.


회사 근처에 도착했지만 차를 델 곳이 없었다. 근처 다른 회사 담벼락 밑에 몰래 대고 사원증을 들고 냅다 뛰었다. 다행히 30분 만에 출근을 할 수 있어서 지각은 면할 수 있었다. 얼른 자리에 앉아 노트북부터 켰다. 이미 와 있었던 척을 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자료들을 마구 띄워 놓았다.


아침 스탠드 미팅 시간이 다가오자 모두들 일어나 사무실 중앙 공터에 모였다. 팀장을 중심으로 모여 오늘 할 일과 어제 했던 업무들을 언급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한 명씩 이야기를 하고 내 차례가 되었다. 말을 하려는 순간 팀장이 나에게 말했다.


"아침에 봤는데, 2500cc SUV 타던데 자네 차인가?

"네 제 차입니다. 중고로 싸게 샀어요"

"나도 2000cc 타는데 자네가 뭔데 2500cc SUV를 타지?

요즘 사원들은 생각이 없는 건지 용감한 건지

나 사원 때는 눈치 보여서 걸어 다녔는데, 참 나"


차를 샀냐는 질문에 농담으로 답하려 했다가 된통 욕만 먹었다. 앞이 깜깜했다. 모두가 나를 본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큰 차를 산 것이 잘못인 줄 난 왜 몰랐지?'

'내가 눈치가 없었던 것일까?'

'내가 왜 이 차를 샀을까?'

'그럼 저 차를 팔고 경차를 사야 하나?'


이후 며칠 동안 모든 생각은 그 팀장의 말을 거치고 나서야 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나의 자신감과 자존감의 8할을 그때 잃었다.


그 팀장의 말은 내 인생에 변곡점이 되었다. 내가 자신 있게 하던 행동들 마저도 쉽게 나서서 하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었다. 괜히 잘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만 앞섰다. 그 팀장은 미웠지만 잘 보여야 한다는 자본주의 관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싹싹하게 굴었다. 내 머릿속에 응어리 보다 그 팀장이 생각하는 나 자신에 대한 요철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다. 그 사람은 나를 평가하고 등급을 매길 수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 등급이 나의 삶 언급하는 척도인 줄로 알았다.


지금에 와서 15년 전 일이 왜 다시 생각난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당시 뼈를 묻겠다고 다짐했던 회사가 주는 첫 고배였지만, 지금 나를 있게 한 선물이기도 하다.


이후로도 나는 그 사람 때문에 부서질 일이 많았다. 미치도록 싫었지만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많은 예시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고의 복수는 잘 사는 것이라 했다. 어쩌면 내가 잘 살기 위해 매일 하는 다짐은 그 사람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만나기는 싫지만 고마웠다.

각자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