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외출할 때 챙겨야 할 물건들을 눈앞에 보이게 한다거나, 신발과 같은 곳에 엮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다음날 아침에 있을 발견을 생각하며 현관에다 물건을 늘어뜨렸다.
옷, 신발, 마스크는 없으면 바로 안다. 두고 나갈 수 없다. 신분증이나 우산, 사원증과 같은 것들은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서야 두고 온 것을 기억해 낸다. 나설 때는 기억하지 못하다가 목적지에 다 와서 챙기지 못함을 기억하는 것은 무슨 심보일까? 나를 관전하는 누군가의 심술일까?
'내일은 꼭 가지고 가야지.'
'잘 보이게 식탁 위에 둬야겠다.'
자기 직전까지 몇 번이고 되뇌었다.
식탁 위에 보기 좋게 올려놓은 가족관계 증명서를 보며 기억의 의무를 다짐했다.
다음날, 두 번째 알람이 울리고 나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어제 가지고 가야 한다는 증명서를 곱씹다 잠들었나 보다. 입에 맴도는 느낌이 익숙하다.
눈도 뜨기 전부터 소화되지 않고 남아있던 생각을 길어 올리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머리가 아프다. 잠을 자도 개운치 못하다. 머리 한쪽 구석에 두통이 잡혔다. 밤새도록 그것만 외우고 생각하느라 잠을 설쳤음이 분명했다.
창작의 고통이 있듯 기억도 고통이 따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고통만큼이나 유를 유지하는 것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언제든 꺼내 감각할 수 있는 것이 기억이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것은 망각이다. 기억과 망각은 동전에 양면과도 같다. 서로가 서로를 전복하며 일어난다.
생각날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감각이 있다. 코끝에서 시작된 간지러움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다. 학창 시절 문제의 답은 알았지만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적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다고 해야 할까? 결국에는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 그간 공부했던 노력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날의 잊고 싶은 경험은 또렷이 기억난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젊었을 때는 기억 몇 개쯤은 잊어 먹어도 지장이 없었다. 실수를 해도 주워 담을 명분이 있었고 열정이 있었다. 지금처럼 축 늘어져 후회만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나이를 먹다 보니 사소한 것을 놓치는 일이 잦다. 기억을 놓친 곳에 스며드는 후회가 점점 벌어져 아려왔다. 이대로라면 자존감이 없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기억과 뇌에 대한 책까지 읽었다.
자주 깜빡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다. 단지 생각이 많아서, 환경이 복잡해서 기억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아서 그렇단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물건을 찾고도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모른다는 것이 큰 문제다. 나는 물건을 잃어버리긴 해도 용도를 모르진 않는다. 안도에 한숨을 내쉬었다. 책에 소개된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아니 자기 집 전화번호를 어떻게 모르시죠?”
아인슈타인은 대답했다.
“적어두면 찾을 수 있는 것을 왜 굳이 기억을 해야 하죠?”
나는 이 구절을 읽고도 한참 동안 침묵을 이어갔다. 애매함과 명확함 사이 어딘가를 헤매는 듯 보였지만 이내 생각을 다듬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신발 속에 사원증을 넣거나, 입어야 할 옷 사이에다 증명서를 끼워 넣곤 했다. 내일 있을 위대한 발견을 위해 조용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