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 비 그리고 바람 Jan 02. 2022

레시피의 배반

삶에 지쳐버린 당신에게 바칩니다.

요즘은 요리라는 걸 조금씩 배우며 맛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흉내 내고 있다. 맛깔스럽게 잘 손질된 싱싱한 재료나 상황에 맞게만 사용된다는 요사스러운 요리 도구는 아직 나에겐 사치일 뿐이다. SNS에 보이는 먹음직 스런 비주얼의 음식을 만들겠다는 것도 아니고, 누굴 위해 만들어 주고 보여줄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 부담이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모든 요리에는 레시피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레시피에는 필요한 재료들이 명시되어 있으며 정량까지 정확하게 나열되어 있다. 1그램 까지도 아주 정확하게 말이다. 그리고 조리 순서도 빠질 수 없다. 데치고 삶고, 볶으며 믹싱 하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순서라는 것을 따르게 되어 있어 씌여진 대로만 해야 비로소 레시피라는 것에 숨이 불어넣어 진다.


나도 처음 요리를 시작할 때 레시피라는 것을 가지고 시작했다. 모든 재료를 구하고, 손질하고 각각의 양념을 정확한 용량으로 덜어낸 그릇들을 나열한 후 순서대로 넣어가며 말이다. 스마트폰과 온몸에 갖은양념들이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럴듯한 비주얼과 풍미, 그리고 까무러칠듯한 맛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 어떤 귀찮음과 설거지 폭탄도 겁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자각하기 까지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맛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모든 것은 정량이었고 순서대로 정확한 시간대로 조리를 하였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맛보는 희한한 맛에 한참 동안 넋을 놓고 한숨만 연거푸 쉬어댔다. 나에게 까무러칠듯한 배신감을 안겨준 레시피 쪼가리와 그 미각 혼란종을 서로 번갈아 보면서 말이다. 이후 가출한 맨탈이 잡히기까지 2~3 주가 걸렸고, 몇 번을 더 시도한 끝에 겨우내 알게 되었다. 재료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재료와 재료가 만나 어떤 맛을 내고, 그런 맛이 어떤 양념들과 만났을 때 어떤 맛이 나며,,, 이런 관계들을 아무것도 모른 채로 시작했던 결과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것도 비슷한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없이 많이 쏟아지는 자기 개발서들과 어른들의 말씀, 그리고 시대나 사회가 원하는 바람직한 인간상 등,, 삶에 대한 레시피는 어디를 가도 존재하는 것 같다. 필요한 재료와 조리 방법은 자신이 선택하면 된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져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착함 1스푼과 성실 1스푼이 섞였을 때는 어떤 친구가 생기고 어떤 결가 나오는지, 여기서 어떤 양념이 더 들어가느냐에 따라 호구가 될 수도,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삶이란 수없이 많은 선택과 맛보기의 연속인 듯하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모든 경우에 수를 허용해줄 만큼 여유가 있지 않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시도로 최대한의 맛을 내는 법을 위해 말이다. 우리가 중간중간 맛을 봐야 하는 이유는 모든 재료를 다 넣고 레시피대로 했음에도 지켜지지 않을 맛에 대한 확고함이 배신을 하더라도 상심하지 않도록, 맛을 보고 만족했던 시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요리를 한다는 것은 레시피대로 재료를 넣고 맛있어 지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재료와 재료들 그리고 양념들이 섞이고 서로 스며드는 과정을 알아가는 행위일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일회용 감정이 있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