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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Nov 26. 2023

면허증과 시력

 며칠 전 운전면허증을 갱신했다.

10여 년 전 이맘때쯤에도 면허증 갱신했었지. 그때가 고작 몇 달 전 일처럼 새록새록 떠올랐다. 시력이 기준치 미달로 나와서 한참 동안 어리바리 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번에도 또 시력에서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스쳤다.


나는 시력이 좋지 못한 편이다. 좌 0.5 우 0.6 수준. 그렇지만 안경은 끼지 않는다. 잘 보이지 않는 불편함은 있지만 불편함도 일상이 되면 익숙함에 밀어 넣고 살기도 하니까. 안경을 끼자니 그건 또 너무 거추장스러웠다. 매번 안경을 추어올리거나 닦아야 했다. 무엇보다 초등학생 시절 안경제비라고 놀림당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안경 꼈을 때의 환함보다 나를 따라다니는 별명이 무척이나 싫었다. 차라리 잘 안 보이더라도 덜 놀림받는 게 낫겠다며 집에 와 안경을 패대기쳤다.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잘 보이지 않는 희미함을 택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말이다.


이번에는 와이프의 렌즈를 끼고 가보기로 했다. 단 한 번도 렌즈를 껴본 적 없던 나. 주변에서 하도 쉽게 꼈다 뺏다 하길래 나도 쉽게 될 줄 알았다. 와이프의 도움을 얻어 호기롭게 도전했다. 왠 걸, 손으로 동공이 보이게끔 벌리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어째 어째 벌리더라도 동공이 계속 눈꺼풀 위로 숨었다. 눈을 중앙으로 모아 겨우 데려온다 하더라도 점점 거대해지는 손가락 앞에서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렌즈를 끼려면 눈을 감지 말아야 하는데 난감했다. 이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반사적으로 막아대는 눈꺼풀과 이물질을 넣어야 하는 주인의 신경전이 한참 동안 펼쳐졌다. 하지만 주인을 이기는 세입자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에는 눈꺼풀을 굴복시키고 렌즈를 밀어 넣었다. 그간 벌어진 격전의 흔적은 벌겋게 충혈된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새 요령이 생겼다. 반대쪽 눈에 렌즈를 넣는 일은 라면 봉지 뜯는 것만큼 쉬웠다. 그리고는 화장실을 나와 거울 밖의 세상을 봤다.


“와~~~~~”


외마디 탄식을 질렀다. 세상의 윤곽이 너무 선명한 나머지 벌어진 입에서 나온 비명소리다. 그동안 내가 봤던 세상은 안경에 김 서린 듯 뿌옇게 흐려있던 세상이었던 거다. 눈에서는 이물감에 따가움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나의 감각은 조금만 더 있으면 괜찮다며 통점을 다독였다. 모든 사물이 깨끗하게 보이는 게 이렇게나 통쾌한 기분이었다니. 선명함에서 오는 쨍쨍함은 시신경을 거쳐 귀속에 있는 달팽이관 마저 충격을 준 모양이다. 오감에 시차를 비틀어 어지러움에 몸서리칠 정도였으니까. 감탄도 잠시, 서둘러 증명사진과 신분증을 챙겨 면허시험장으로 향했다. 결과는 대성공. 좌 우 시력이 0.9까지 올라가는 기적을 만끽했다. 만족스러웠다.


집으로 오는 길 여유롭게 노래를 들으며 운전했다. 면허증 하나 갱신했을 뿐인데 승전보를 울리는 장수처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터널을 몇 번 오갔다. 기이한 감각이 뒷덜미를 후려치는 듯했다. 터널에 들어가면 LED조명 하나하나가 가까이에서 부서지며 온몸을 간지럽혀 주는 느낌이 들었고, 터널을 나오면 환한 햇볕 아래 뻗쳐있는 나뭇가지들의 살랑임이 느껴졌다. 신기했다. 면허증을 갱신하러 갈 때는 몰랐다. 시력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가려져 있던 감각이 나올 새가 없었던 거 같았다.


운전에 집중하지 못했다. 평소 보이지 않던 앞차의 번호판 숫자, 저 멀리 보이는 산속에 위치한 용도 모를 건물들, 햇빛이 무언가에 부서져 내 손목 위에 흩뿌려진 그림자의 기이함. 보는 곳마다 새로웠다. 시각에서 오는 선명함이 세상을 감각하고 느끼는 신경에 이렇게나 깊이 관여했던가? 혼자 중얼였다. 호기심에 놀란 동공은 이곳저곳을 보기 바빴고, 그간 아무렇지 않게 치부했던 사물에서 특이함을 길어 올리는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운전하고 오는 내내 새로움에 두 눈을 맡겼다. 중간쯤 왔을까,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 예전처럼 두리뭉실하게 보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렌즈를 빼고 싶었지만, 어떻게 빼는지도 모르는 데다 설령 뺄 수 있다 하더라도 운전 중에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서둘러 운전해서 집으로 왔다. 불과 2시간 남짓 다녀왔지만 일주일 동안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기력이 빠져있었다. 시차적응을 못해 힘이 들어가지 않는 묘한 감각에 시달렸다. 그리고는 화장실로 달려가 서둘러 렌즈를 뺏다. 현실로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 여독을 풀어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금방 뺄 수 있었다. 그때는 눈꺼풀도 나도 모두 한마음이 되어 렌즈를 제거했다.


다시 뿌연 세상이 펼쳐졌다. 물에다 우유를 부은듯한 희멀건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눈에 문제가 있나 싶어 한쪽씩 눈을 가려가며 사물을 봤다. 왼쪽과 오른쪽 번갈아 보아도 역시 희미하게 보이기는 마찬가지. 과거 익숙한 감각이 살아나는 듯했다. 흐릿함에 오는 실루엣의 덩어리 진 감각이 그저 반가웠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게 밖을 바라봤다.


겨울 늦은 오후, 날은 무척이나 추웠고 바람도 매서웠다. 겉옷을 한껏 여민채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낮게 깔린 햇빛 탓에 자기 키보다 더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들 얼굴 낱낱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기분일지는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안도감이 들었다. 다시 나다운 세상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잘 보이지 않는 만큼 호기심으로 채워 나가면 되는 거니까.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무뎌지는 것에 순응한다는 말 같기도 하다. 세월을 정면으로 맞선 만큼 눈앞이 흐려진다는 것도, 선명하게 펼쳐질 앞으로의 희망보다 흐릿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추억에 희비가 더 자주 교차 하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이 있다. 젊어서 혈기왕성함은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내며 자신의 윤곽을 선명하게 하기 위함이고, 나이를 먹어가며 점점 옅어지는 기력은 그간 선명했던 윤곽이 흐려져도 사는데 문제없음을 알아가는 과정 같았다.


옷장 안에 빨려 들어가 새로운 세상을 여행하고 돌아온 나니아 연대기 이야기가 떠올랐다. 꿈이라 하기에 생생하지만 현실이라 하기에 다시없을 그런 몽롱한 느낌을 매만졌다. 화장실에 렌즈를 들고 빨려 들어간 그곳에서의 감각이 아직 생생하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면서도 다시금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새로움도 일상이 되면 익숙해지겠지만 과거의 불편함도 지내다 보면 편안함이 될 수 있음을 더 반기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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