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커서만 30분 넘게 본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 스스로의 욕망에 가닿질 못한다. 이거는 식상해서 별로고 저거는 재미가 없어 별로라 한다.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사춘기 아이 같은 기분과 그런 아이를 둔 부모의 입장 모두가 동시에 포개진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 또한 내가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정의 일부라 생각하는 편이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나는 이런 심란한 기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렇지만 거스를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 나는 이상한 다짐을 했다. 남들이 다 좋아한다고 해도 나는 다를 것이다는 말. 그냥 침 흘리고 있는 사람 중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자기 연민 같기도 하고, 자기 우월 같기도 했다.
누군가 새로운 물건을 가져와 이목을 끈다. 주변은 그것을 구경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한 이들과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눈빛을 한 이들이 같이 공존한다. 마치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 이들 또한 그렇게 보였다. 서로가 뭉쳐있는 듯 보이지만 상반되는 감정 때문인지 분리되어 있는 상황이 그저 신기하다.
나도 어서 가서 보고 싶었다. 어떤 물건인지 만지고 싶었고, 내가 가질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 보고 싶었다. 램프의 요정을 지닌 알라딘의 기분 같을 거라며 혼자 우쭐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오감은 그 물건을 향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나는 감정의 말만 믿고 본성을 거스르고 있었다. 욕망의 중력과 반대로 나아가다 보면 ‘오기’라는 게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오기가 꺾이지 않으면 고집이 되고, 이런 고집이 모여 아집이 되는 거 같다. 그때 쓸 때 없이 좌우명을 만들었다. 나는 절대로 세상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누가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나는 내 갈길만 가겠다고.
지금 내 글쓰기가 딱 이런 상황이다. 근거 없는 아집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글만 쓰며 밀고 나가면 되는 걸까? 아니면 베스트셀러 작가나 인플루언서들이 쓰는 글처럼 써야 하는 것일까?
전자는 나는 만족스럽지만 벽 보고 쓰는 거 같을 것이고, 후자는 독자의 눈길이 조금 더 오래 머물겠지만 내가 힘들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나는 남들이 좋아하는 길을 그대로 걷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올해를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역시 브런치 북을 통한 응모의 벽은 높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은 따로 있었다. 사는 게 힘들어서 글 세상으로 들어왔지만, 나만 좋다고 해서 계속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거 같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가 원하는 글을 써야 하나 싶다. 관중이 없는 무대는 아무리 완벽해도 리허설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