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다짐했다.
일주일에 브런치에다 최소 글 2편씩 쓰기로 말이다. 누군가에게 글 2개 쓰기란 별일 아닐지 몰라도 나에게는 별일이 맞다. 한편도 겨우 쓴다는 말에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나는 매일 쓴다. 매일 쓰는데 왜 2편을 못쓰냐고 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내가 쓰는 글 대부분, 그러니까 90% 가까이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로 채워진다.
오늘 누가 어떤 말을 했는데 기분이 어떻더라, 퇴근길 어떤 장면을 받는데 기억에 남았다 같은 이야기들. 누군가에게 말하기 싱겁지만 글로 쓰기에 충분한 이야기가 나에게는 더 많다.
하루를 살아내면 사소한 이야깃거리가 꼭 1~2개씩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써보니까 몸이 알아서 미리 준비해 주는 것 같다. 나는 그런 거저주는 이야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생각의 물꼬가 마르기 전, 떠올렸던 모든 감각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글과 포개 담으며 하얀 백지위에 주워 담는다. 소중한 추억에다가, 기억에다가.
그렇게 내 글은 하나 둘 쌓여갔다. 눈 내리는 날, 나뭇가지 위에 소록소록 눈이 쌓이듯 내 글들도 조용히 쌓여 갔다. 기분이 좋았다. 글 제목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감정이 한꺼번에 넘어왔다.
이런 하루를 살다 보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 쓰기는 소홀해지는 것 같다. 어떤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이라 공감이 안될 것 같고, 또 어떤 이야기는 너무 평범해 글거리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이런 고민하는 상황 자체가 싫다. 글은 좋은데 글 어떻게 쓰고 무엇을 쓸지 고민하는 게 싫다니. 꼭 어린아이 반찬 투정 같다. 모순 같고 장난 같지만 진심이다.
나는 글쓰기보다는 글 쓰는 시간 자체가 좋은 것 같다. 내 생각이 활자로 변환되며 읽음이라는 활동이 따라오는 순간 말이다. 생각과 활자 사이에 그 간극을 알고 좁히려는 의지, 그 안에서 퇴적 풍화작용을 거친 말들이 고로수액처럼 떨어지는 상황을 즐긴다는 거다.
주변에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늘 하는 말이 있다. “난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술을 먹는 자리 그 자체가 좋은 것이다”라고. 나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알코올을 붓기 위한 핑곗거리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이 말이 주는 의미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고 내밀한 대화가 오간다. 수많은 고백과 증언이 이어진다. 그 사람의 본질에 대해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순간에 머물기, 상황에 감각하기, 그리고 그런 상황에 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은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단어를 내리며 생각을 주고받다 보면 글에 취하는 상황이 온다. 나와 이어진 또 다른 생각의 흐름을 잡을 수 있다.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가 취기를 빌려 본심을 말하고 듣게 되는 이치 같다.
디딤돌 하나를 딛고 나면 다음 디딤돌이 보이고, 다음 디딤돌을 딛고 나면 그다음 디딤돌이 보이기 시작한다. 상황에 발을 디뎌봐야 뛰어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쓰기는 이런 점에서 좋다. 언제든 자리를 만들어 글과 나와 이어진 연결점에서 곡진하고도 섬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 주니까. 승자보다 패자가 말이 더 많은 법이다. 서로 치이고 부대끼며 삶에서 약자로 억울하게 살아왔으니 할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꼭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글이 더 많은 공감을 일으키기도 했다. 어쩌면 가장 보편적인 공감은 가장 사적인 경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일지도.
뭐든 답은 없다. 단지 쓰기가 촉구하는 의식의 흐름이 놓이는 상황이 좋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