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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May 01. 2024

글은 시키는 것이다?

 한참을 망설였다. 

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힘에 부딪혀 나아갈 수 없다. 책상 앞에 들리는 경쾌한 키보드 타자음은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것일까? 억지로라도 쓰고 싶었지만 한 글자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느닷없이 현실에 찾아온 가위눌림 같다. 얼마 전부터 내 몸과 마음에 느끼던 심상의 변화를 끄적여 본다.


요즘 AI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블로그를 쓰기 위해 접했다. 내 이야기는 막힘없이 쓸 수 있겠는데, 정보성 글이나 논리적인 글은 어려웠다. 자료를 모아 하나하나 이어가는 일이란 또 다른 고통의 연속이었다. 몸에 익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자고로 작가란 창작의 갈래를 피워 올려야지 이런 논리적인 글에만 전도되면 안 된다며 혼자 중얼였다. 블로그를 그만두거나 다른 방법을 찾을 궁리를 했다. 중단에 대한 죄책감을 덜 짊어지기 위한 핑곗거리만 떠올랐다. 차라리 그때 그만두었어야 했다. 되려 엉뚱한 곳에 상자를 열어버렸다. 호기심 많은 사람이 절대 열지 말아야 할 상자, 바로 AI라는 존재 말이다.


AI는 상상 이상이었다. 내가 몇 시간 동안 뒤져가며 찾은 자료보다 AI가 단 몇 초만에 흩뿌린 단어에 볼 것이 더 많았으니까. 그냥 아무 말이나 늘여놓고 빠름이나 강조할 줄 알았다. 내 눈치를 보며 피드백이나 받을 요량으로 보여주겠지 했다. 나는 크게 한방 먹고 말았다.


AI를 알고나서부터 쓰는 상태의 마음가짐이 바뀌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쓸 사람이 나밖에 없고 나만 쓸 수 있다였다면, 이젠 얘가 쓰고 나는 검토한다 느낌으로 쓴다. 점차 의존도 또한 높아졌다. 블로그 글 하나를 AI가 거의 다 쓰고 나는 인사말 정도만 붙였던 기억이 있을 정도. 


쓰기에 있어 뇌의 특정 부위를 사용하지 않는 기분이다. 글 한편 집중해서 쓰고 나면 머리 이곳저곳이 쑤시고, 어깨며 등이며 뻐근해서 난리가 나야 정상인데, 그저 눈만 좀 따가울 뿐이다. 초조한 눈빛으로 완성된 글을 본다. 나는 내심 바랬다. 문법에 맞지 않거나 어설픈 표현 투성이면 좋겠다고. 쉬우면 악이고 어려우면 선이라는 말을 20살 때부터 품고 살았던 나 아니던가.


디지털 쪼가리가 지어낸 결과물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한식을 배불리 먹으면 나오는 시원한 매실차와 같은 목 넘김이다. 소름 돋았다. 남들은 AI가 썼는지 모를 것 같다는 생각, 나만 사용할 수 있다는 소유욕에 휩싸였다. 나는 푹 빠져버렸다. 내심 마음속 깊은 곳에 반응하는 찝찝함을 뒤로한 채 말이다.


AI의 횡포는 점차 심해졌다. 내가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갈 때마다 마침 기다렸다는 듯 더 신기한 물건을 꺼내 왔다. 글을 넘어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만들었다. 심지어 사진을 가지고 동영상까지 만들어 줬다. 생각하는 대로 모든 것이 눈앞에 펼쳐졌다. 설마 이게 돼? 하며 검색해 보면 이제 왔냐는 식으로 늦깎이를 탓했다. 작가, 작곡가, 화가를 모두 농락하는 그 능력에 감탄과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라이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지니의 램프를 파는 보부상을 만난 기분이다. 어렸을 적부터 염원해 왔던 현실이 지금에서야 이루어지는구나 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고 났더니 현실이 꿈같고, 꿈이 현실 같다. 더 이상 현실은 믿을게 못되었다. 꿈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루어질 수 없기에 염원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은 없는 것 같았다. 



영화 메트릭스에 보면 빨간 약과 푸른 약을 선택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이후로는 돌아갈 수 없다. 파란 알약을 먹으면 이야기는 끝나고, 너는 침대에서 깨어나서 원하는 것을 믿게 된다. 빨간 알약을 먹으면 너는 원더랜드에 머무르고, 나는 토끼굴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줄 것이다. 기억해, 내가 제공하는 것은 진실뿐이다.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신기함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한 상황을 관전했더니 영 글이 쓰고 싶지 않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끼던 찝찝함이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나도 모르게 빨간약을 먹었는데, 원더랜드 같은 세상에서 글을 쓴다면, 쓰는 글이 다 허구이고, 그냥 하릴없이 떠도는 하찮은 존재 중 하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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