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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Jul 14. 2024

한잔하기 좋은 날

 오늘은 금요일, 오랜만에 날씨가 좋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메신저가 왔다. 나랑 동갑내기 직장 동료. 날도 좋은데 오랜만에 한잔 어떠냐고 한다. 순간 장마와 업무에 지쳐 다 죽어가던 마음에 건조한 순풍이 든다. “아~ 진짜?” 혼잣말로 들뜬 목소리를 냈다. 채팅에 음성 지원이라도 되는 것 마냥 들뜬 억양으로 답장을 보냈다. 들썩이는 엉덩이를 누군가 한심한 듯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 맞다. 필라테스. 오늘 필라테스 가는 날이구나” 


매주 금요일은 필라테스 가는 날. 일 때문에 이미 2주나 빠졌다. 오늘 만큼은 꼭 가겠다며 벼르던 찰나다. 비장함 속에 끼어든 유혹이 무척이나 달콤하다. 누군가 나를 떠보는 것 같다. 그 누군가에 눈치를 본다. 업무 하며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마음은 이미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고민했던 것은 필라테스를 갈 수 없는 정당성을 찾고 있었을 뿐.


퇴근시간, 술약속 유혹은 생각보다 싱거웠다. 허리와 건강이라는 당위성 앞에 그 무엇도 앞설 수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쪼르르 따라갔겠지. 사회생활 하려면 어쩔 수 없다느니, 이런데 안 가면 고립된다느니 하며 말도 안 되는 핑계 뒤에 숨었을 거다. 지금은 다르다. 안이한 생각에 결말을 알고 있다. 부모님 말씀이 결국 맞더라 라는 사실을 지금에야 깨우치는 중이니까. 이 엄정한 인과관계를 알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필라테스 옷을 낑낑대며 입는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끼는 것 같다. 날이 더워 땀 때문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술약속에 가지 못해 짜증이 난 걸지도. 원장님은 무표정한 내 얼굴을 비장함의 각오로 읽으신 듯했다. 그는 생각이 많을 때는 역시 운동이 최고라 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따라 “10개만 더~”라는 원장님 외침이 고맙게 들리기까지 했다. 


땀방울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진다. 플랭크 자세에서 팔과 다리를 번갈아 들다 대자로 뻗어버렸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따뜻함이 눈가를 따라 내려간다. 혼자 번뇌했다. 잠시 쉬고 싶다며 바닥에 얼굴을 붙인 채 생각에 잠겼다. ‘불금에 난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거기 따라갈 걸, 사서 고생하고 있네’ 거친 숨소리만큼이나 후회도 컸다. 지금쯤 동료들은 야외 테라스에 앉아 시원한 맥주 마시고 있겠지. 안주로는 치킨을 시키고 내가 쫄쫄이 입고 필라테스 한다며 킥킥대고 있을 모습을 상상했다. 부럽다가 약이 오르다가 결국 부끄러움으로 천이하는 묘한 감정에 슬며시 실소가 났다.


그날 불금은 맞았다. 온몸이 불타올랐다. 등과 허벅지는 심장박동이 느껴질 정도로 열이 났다. 후들대는 다리를 부여잡은 채 건물을 나섰다. 습하지만 순한 바람이 쏟아져 내렸다. 초복을 1주일 앞두고도 상쾌할 수 있구나. 저녁 7시가 넘었지만 겨우 어스름한 거리를 본다. 맞바람에 땀을 어느 정도 실어 보내자 서서히 생기가 돈다.


그래 나는 근육통을 얻었지만 그들은 숙취와 두통을 얻을 거라 했다. 저주는 아니지만 축복도 아닌 말을 내뱉었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술자리 치고 다음날 멀쩡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영수증에 찍힌 시간과 금액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가족과 함께 지내는 휴일 또한 삭제해야만 했던 경우가 다반사 아니던가.


나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알맞게 퍼즐을 맞춘 기분이 든다. 놀기 좋은 날일수록 퍼즐 한 조각의 의미가 컸다. 신의 한 수를 놓은 듯한 기분이다. 테트리스에서 작대기 빼고 나와 절망하다 마침내 나왔을 때 그 기분 같다랄까.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땀을 씻어 내리며 덩달아 묵혀두었던 후회도 씻겨 내려갔다. 인내의 보답으로 맛있는 걸 먹겠다며 혼자 중얼였다. 


저녁은 라면이다. 선풍기를 켜고 티브이 앞에 앉았다. 김이 모락 나는 라면을 한 젓가락 지켜 들어 후후 크게 분다. 꼭 추운 겨울 입김이 도는 것 같다.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 한입 크게 넣었다. 꼬들한 면발에 감탄이 나온다. ‘아~’ 이보다 더 행복한 날이 있을까. 동료가 말했던 오늘의 정의를 다시 하고자 한다. 


술 먹기 좋은 날이 아니라, 운동하고 라면 먹기 딱 좋은 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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