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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Sep 08. 2024

비가 오면

 비가 온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더니 벌어진 일이다. 집안에만 있어 몰랐다. 곱게 날리는 빗물은 아파트 안에서는 알아차릴 방도가 없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내리는 빈도가 많아지면 세상은 조용한 악기들로 뒤덮인다. 음계를 가진 빗물들이 저마다 음색을 가지며 떨어지기 시작하니까.


땅, 따, 따당, 따,

제법 굵어진 빗물이 속이 빈 알루미늄 새시를 때리자 나는 소리다. 티브이를 보다 익숙한 리듬이 배경음처럼 깔리는 것을 들었다. 티브이를 껐다. 그제야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창 밖을 내다봤다. 깜깜한 밤이라 빗방물의 궤적은 알 수 없지만 비가 온다는 사실 즈음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 비가 오기 시작할 때 피어나는 흙냄새를 기억한다. 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다. 흙 특유에 비린내가 마침 진동하고 있었으니.


옷을 입는다. 입는다기 보다는 옷에 뚫린 구멍에 아무거나 먼저 쑤셔 넣는다는 말이 맞을 정도. 옷을 뒤집어 입은 듯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서둘러 슬리퍼를 신고 우산을 챙겼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스마트폰을 가져오지 않았음을 알았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나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질문에 답할 새도 없이 공동현관 밖으로 발을 디뎠다. 지금 빨리 맞으러 가야 했다.


비는 생각보다 촘촘히 내리고 있었다. 빗물이 모여 신발을 적실 정도는 아니지만, 이대로 걸으면 발등은 다 젖겠다 싶을 정도. 분리수거를 자처하며 몰래 담배피턴 아빠들도 서둘로 귀가 중이다. 이미 듬성하거나 희끗한 머리를 한 이들의 호들갑에 웃음이 인다. 우산을 폈다. 손잡이 달린 거 아무거나 들고 왔더니 와이프 우산을 가져왔다. 검은색에 노란색 땡땡이 우산을 쓰고 있으니 흡사 곤충이 된 기분이다. 우산에 날개라도 달린 사람처럼 발걸음은 가볍다.


누군가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것 같다. 몸은 차분히 가라앉는다. 서서히 늘어지는 티셔츠 무게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빗물이 몸에 닿기 시작하자 어렸을 적 빗속을 우산 없이 거닐던 때를 상상했다.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 간혹 고운 물 입자가 모여 발등을 미끄럼 타며 간지럽히기도 했다. 발바닥에 고인 물이 따스하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에 귀 기울였다. 지금부터 자기 소리를 들어 보라는 속삭임 같다. 땅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내 발걸음, 우산 위로 떨어지는 우다다 빗소리가 어울린다. 묘하게 엇박이지만 진지한 화음처럼 자연스럽다.


빗소리에는 감정을 흔드는 힘이 있다. 그동안 혼자 숨죽이며 눈치 보던 마음에 느닷없이 청진기를 대는 기분 같다. 콩닥이는 가슴, 나아가 들숨과 날숨에 스민 공기기운에 숨겨진 속마음을 들춰보는 것 같다. 갑자기 엄마가 생각나더니 아빠가 생각났다. 다 큰 어른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우산을 눌러써서 그런지 눈가가 촉촉하다. 우산 밑을 둘러본다. 빗물이 새는 건 아닌지 살폈지만, 역시 구멍 난 곳은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눈가를 훔쳤다.


얼마 전 장례식장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축의금 보다 부의금 내야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음은 잘 알고 있던 터다. 부모님 계실 때 잘하겠다는 다짐을 새로 갱신하는 중이다. 매번 핑계를 대며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애 아파서 못 가고, 바빠서 못 가고, 이제는 내가 아파서 못 갔다. 매번 핑곗거리는 기가 막히게 생겼다. 부모님께는 어떤 변명을 둘러대도 죄책감이 덜 드는 것 같다. 사회생활 하기도 억울한데 부모님께라도 마음대로 하고 싶은 심보인가. 아니면 항상 곁에 있다는 생각에 ‘언제든지’라는 수식어로 마음 편히 먹는 것일까.


완전히 어두워진 거리. 아파트를 크게 두 바퀴 돌았음에도 비는 아직 한창이다. 거리 곳곳에 조그마한 웅덩이가 생기는 중이다. 가로등이 없는 곳만 골라 걸었다. 걷다가 마음이 정리된 것인지 한숨을 크게 내쉰다. 순간 발걸음도 땅을 향해 크게 내디뎠다. 철퍽하며 사방으로 물이 튄다. 흡사 그 소리가 ‘청승’이라고 들리는 듯하다. 땅을 친다는 기분에 마음은 후련하다. 그동안 쌓아 두었던 걱정과 염려를 뿌리는 기분이다.


비가 와서 좋다. 깊은 곳 묵혀두었던 응어리를 모두 털어낸 것 같다. 집에 들어가기 전 우산을 미리 접었다. 쏟아지는 빗물에 근원을 보고 싶어서다. 눈 안으로 비가 들어찬다. 무척이나 따갑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마침 쏟아내고 싶었는데 비가 와서 참 다행이다. 비는 아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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