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이들을 보며
손목에서 자지러지는 진동이 느껴졌다.
알람으로 맞춰둔 워치 진동이 나를 깨운다. 몇 시인 줄 알면서도 손목을 들어 시간을 살핀다. 암흑 속 둥실둥실 떠다니는 숫자를 본다. 새벽 5시 40분. 그 뒤로도 10분 간격으로 3개의 알람이 더 있지만 나는 40분에 일어나는 것으로 타협한다.
마지막 알람을 듣고 일어나더라도 지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알람으로 일어나면 마음 한편에는 조그마한 죄의식이 맴돈다. 어떨 때는 지각보다 더한 죄책감이다. 원래 의도는 이게 아니었다. 스스로 정한 한계 안에서 자유를 찾고자 했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하루에 포만감이 높을 것 같았으니까.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에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나의 타협안은 항상 나를 더 희생하는 쪽에 가까웠다. 조금 늦게 가도 되고, 즐기면서 가도 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 장남과 가장, 그리고 90년대 IMF 사태를 머리가 굵어질 대로 굵어진 고등학생의 시선으로 맞이한 세대로써 게으름은 마치 죄를 짓는 것과 같았다. 약속시간 보다 기본 30분 전에 도착해야 했고, 상대가 늦더라도 1시간 정도는 싫은 소리 없이 너끈히 기다려 줄 수 있었다. 심지어 주차마저도 바깥쪽 주차선에 한껏 붙여두어야 마음이 놓였다. 마치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의무를 가장한 배려나 권장을 꼭 도덕적 책무인 듯 짊어지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라도 한 걸까? 그냥 내 마음 덜 아프고 더 하고 싶은 쪽으로 살면 되지 않을까? 마음대로 살겠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 몸에 베인 습관 때문인지 거침없이 행동해도 불쾌함을 줄 만큼 건방지지 않았으니까.
내가 받는 스트레스 8할은 내가 정한 선을 넘는 이들 때문이다. 그 선은 내가 넘지 않는 선이기도 했다. 내가 지킨다고 해서 그들도 지켜야 할 이유도, 의무도 없지 않나. 욕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움츠렸던 과거가 지나간다. 어쩌면 나를 매너나 젠틀함 보다는 만만함으로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금씩 금 밟는 연습을 한다. 한계점이 어디인지를 시험한다. 약속장소에 일부러 늦게 가거나 늦은 출근을 하기도 한다. 매번 그들이 자행했던 방식으로 말이다. 보복이나 타인의 행동에 대한 비아냥은 아니다. 단지 그들이 선을 밟고도 괜찮을 수 있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을 뿐이니까. 역지사지란 타인의 기분을 고려하기보다, 나를 위한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