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캐한 연기 때문인지 코끝이 따갑다.
우리 집 주변에는 굽는 집이 많다. 소위 고깃집으로 불리는 가게가 아파트 반경 100미터 안에 10개가 넘는 것 같다. 밤만 되면 소, 돼지, 닭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육류를 태우는데, 바닷가 집어등 같은 불을 켜고 희멀건 연기를 연신 뿜어낸다. 사람들은 연기와 불빛에 홀리기라도 한 듯 삼삼오오 몰려든다. 특히 금요일만 되면 유혹은 더 심해진다. 연기도 빛도 사람도 불나방처럼 몰려들어 한 주의 분주함을 증언하는 듯했다.
금요일 저녁, 오랜만에 산책을 했다. 열대야를 무색하게 할 만큼의 초열대야 때문에 산책은 고사하고, 분리수거 마저 각오를 해야 가능한 일이 되었다. 오늘은 조금 날이 풀어지기도 했다. 습하기는 했어도 머리칼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 때문인지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장미 넝쿨로 뒤덮인 담장 모퉁이를 돌았다. 자욱한 연기만큼이나 분주한 거리와 마주했다. 순간 알 수 없는 괘감이 바람과 함께 몰려왔다. 한적함과 북적임이 만나는 곳에서만 가능한 포근함이랄까. 집 앞에서 공존하는 두 가지의 감각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묘한 이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백열등 전구가 늘어진 가게의 불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통유리 안에 가득 들어찬 이들이 보였다. 노르스름한 조명아래 그들은 모두 웃거나 마시고 있었다. 사실 지금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난데, 그들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 같았다. 혼자가 즐거운 사람은 서로가 즐거운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유리 하나를 두고서 공존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기분이 나쁘지 않을 만큼 그들을 응시했다. 혼자가 주는 고독의 쓸쓸함과 안도, 많은 이들 사이에 머무는 다복한 웃음과 소속감을 부러워하는 감정 같은 것들이 서로 섞이고 흩어졌다. 혼란스러움 보다는 차이를 알 것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걸음을 옮기며 여러 감정이 주는 풍요를 느꼈다. 주머니에 스마트폰은 없었다. 진동일지 모른다는 감각 때문에 손을 대야 하는 수고 따위도 필요 없었다. 노래나 영상에 의존하지 않고 거리에서 쏟아지는 밤기운을 감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다시금 떠올렸다. 선선할 때 옷깃을 여미며 산책하던 과거가 떠올랐다. 한동안 잊고 살았다. 사람 변했다는 말을 듣지 않고도 나 자신을 돌아보며 중도라는 선을 찾아가던 때 말이다.
산책은 어쩌면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한 버튼일지 모른다. 거리를 걸으며 애쓰지 않으면 감각할 수 없는 것들과 마주한다. 익숙한 것에서 새삼스러움을 느끼며 과거에 있던 나를 회상한다. 또한 언젠가에도 있을 나의 미래도 떠올린다. 문득 스쳐가는 감정과 나를 지나치는 과정을 모두 담은 후에야 비로도 안도한다. 단지 걷는 것 만으로 평온이 오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라도 걸으며 자신을 둘러싼 것과 자신의 차이를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럴 수도 있음을, 달라도 괜찮다는 사실을, 실수해도 괜찮다는 진심을 마주한다.
언젠가,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 짓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관계 속에 쓸려 다니며 악착같이 타인을 붙들어 매던 과거 속에 내가 살았다. 자신에 대한 정의를 스스로 세울 수 없었던 시절이 그렇게 길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공리주의자들 말처럼, 다수의 웃음이 최대의 선인 것 마냥 따라다녔다.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바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었던 것 같다. 복권 당첨보다 낮을 확률로 당첨될 거란 희망도 희망에 한 종류라 할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가기 아쉬웠던지 발걸음은 계속 어딘가로 향했다. 때로는 사람이 많은 가게를 거닐다가 때로는 정적이 머무는 놀이터로 향하기도 했다. 한 여름밤에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하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