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쓸거리가 있어서 쓰는 게 아니었다.
단지 생각할 수 있고, 그 생각이 반복적으로 오가다 보면 익숙한 감정과 마주할 수 있다. 그럼 글로 옮길 수 있다. 꼭 기복이 있어야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선을 긋고 경계를 허물어서 쓸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무에서 유, 올바른 창작의 형태라 할 수 있겠다.
어떤 날은 글감이 없어 쓰질 못한다. 매일 쓴다는 꾸준함에 이유 모를 사명감을 안고 살아 가지만, 글감이 갈수록 소멸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주제는 저번에도 썼고, 저저번에도 썼다 하지 않았나. 가뭄에 드러내는 강바닥처럼 쓰지 못할 핑계만이 바닥에서 드러난다. 매년 갱신되는 글감의 고갈에 탄식하곤 한다. 그때마다 창작의 고통이니 작가라면 지녀야 할 암울한 업보 같은 말로 스스로를 위안할 뿐이다.
한때는 ‘글감을 위해 삶을 비틀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매일 같은 하루를 사는 이에게 그런 삶을 초월할 수 있는 글은 나올 리 만무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당장에 글이 힘들고 안 써지는 이유를 일탈하지 못함에서 찾았던 것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나온 임기응변이었으리라. 결국 하루를 이상하게 살아야 글을 계속 쓸 수 있다는 황당한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런 확신은 불과 며칠 만에 무너지고 만다. 이내 일상에 내몰리고 파묻히고 잊혔다. 그냥 바쁘고 힘드니 하던 대로 하자식의 관성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요즘은 쓰기 힘들면 그냥 읽는다. 읽기와 쓰기는 글을 대하는 다른 자세이지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비슷한 듯했다. 누워서 읽다 보면 어느새 앉아서 쓰기도 하고, 쓰다 보면 읽기도 했다. 서로에 전환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서로가 서로를 내어주는 것임은 분명했다. 근래에는 읽기 쪽에 더 비중을 두는 것 같다. 그가 무심한 듯 툭 하고 내려놓은 글에 감탄하는 중이다. 흔해빠진 사소한 이야기 같아도, 빠져들게 하는 요소가 활자 곳곳에 숨어있음이 분명했다. 무릎을 치고 외마디 감탄사를 나도 모르게 뱉어내는 힘이 그 책에 도사리고 있었다.
알아가는 재미, 그러니까 원래 있던 것에서 어떻게 정의하고 동의하는 가에 따라 좋은 글과 그렇지 못한 글로 나뉘었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다. 수십 년간 겪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들이 있었다. 좋다, 아주 좋다, 예쁘다, 아름답다, 황홀경이다 등 대놓고 좋다를 시전해도 표현하지 못할 감정들이라는 게 있다. 나쁜 감점, 아무 생각 없음 조차도 하나의 감정을 대신할 수 있었다. 무수한 감각들의 조합에서 무한에 가까운 감정들을 소환했다가 잊힌다. 그렇지만 매번 생소한 것은 아니다. 그때 그 감정이구나 하며 재회에 대한 반가움을 표현하지만, 감정의 개인성 때문에 어디 말하지 못한다. 아니 말하고 싶어도 어떻게 표현할 줄 몰라서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감정의 재회를 타인의 글에서 만나면 그렇게 반갑다. 마치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듯한 기쁨에 휩싸인다. 당시 같은 공간에 있었던 친구와 선생님 이름을 나열하고, 얼빠진 채 벌 받으면서도 킥킥대던 기억을 공유한다. 나만 알던 사실이 타인과 함께 아는 사실이 되면 이렇게나 반갑다. 이런 기쁨을 글에서 만끽할 수 있다니. 나는 말 못 할 감정의 반가움을 만끽하는 기준으로 잘 쓴 글과 그렇지 못한 글로 구분 짓곤 한다. 나를 글로써 붙들어 매는 힘은 여기에서 나오는 것 같다. 과거로써의 회귀가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이어온 감각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다. 드디어 이름을 알았다는 사실에서 말하지 못할 희열과 쾌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결국 글 쓰기를 위한 글 읽기는 다시금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작가의 본분은 쓸거리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생각을 감각하는 방법과 예시를 타인에게 알려주는 컨설턴트가 아닐까 싶다. 세상은 아직도 아는 만큼 보인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는 더 그럴 것이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고 느껴왔던 묘한 감정의 이유와 효과를 알게 되었다면, 자신의 크레파스에 한 가지 색이 더 추가된 것과 같다. 24색으로 그린 그림보다, 48색으로 그린 그림이 훨씬 더 다채롭게 다가올 것이다. 이는 산술적으로 2배 늘어난 색채 때문이 아니다. 다양한 색을 동원할 수 있음과 늘어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가능성 때문이 분명하다. 작가가 말하는 창작의 고통이란 어쩌면 통점에서 오는 아픔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색깔 중에 무엇을 칠해야 할지 모름에 오는 행복한 비명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