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방과 후 서예 학원을 간다.
미술학원도 웅변도 모두 적성에 맞지 않았던지 눈물과 맞바꾼 학원이다. 학원은 집 근처 재래시장 안에 있었다. 그때만 해도 대형마트는 없었다. 소위 ‘점빵’으로 불리던 슈퍼마켓이 전부. 시장에는 할인카드도 시식코너도 없었지만 알게 모르게 행해지는 곳이기도 했다. 없는 것 빼고 전부 다 있는 곳에서는 음식냄새가 있었고 사람냄새가 있었다. 아직도 그 여정에서 만나는 것들의 감각이 생생하다. 어쩌면 나는 서예를 좋아했다기보다, 그곳에 가기 위해 머물러야 할 시선과 냄새의 궤적을 즐겼던 것이 아닐까?
시침은 오후 5시 숫자 위에 걸쳐있다. 노란색 학원가방을 열었다. 돌덩이 같은 벼루와 새치가 가득한 붓 2자루, 화선지를 확인 후 다시 닫았다. 짙은 먹물냄새와 마른 종이냄새가 폴폴 풍겼다. 아파트 바로 앞 큰 도로만 건너면 시장 입구가 나온다.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다. 서둘러 집을 나섰다. 매서운 칼바람이 불더니 파전냄새를 묻히고 달아났다. ‘왜 배고플 때만 맛있는 냄새가 나느냐고’ 괜히 시장을 나무란다. 반찬 투정으로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쫓겨나다시피 현관밖으로 내몰렸다. 밥 한 숟가락 더 먹고 오지 못했음을 후회했다. 오늘따라 저기 놓인 달달함을 무사히 통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말발굽처럼 생긴 시장 간판을 지나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웅성임과 냄새가 여기로 모인 듯했다. 시장 초입에는 항상 할머니들의 안방 같은 곳이다. 형형색색의 털조끼로 무장한 채, 무언의 언어로 강매를 호소한다. 할머니들은 서로 경쟁하는 듯 보여도 앞에 내어놓은 나물의 색깔과 크기는 조금씩 달랐다. 오늘은 눈빛을 마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느슨한 주름사이로 그늘진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면 왠지 모를 죄책감을 끌어안아야 했으니까. 눈빛을 피하면서도 그들의 쪼그라든 손을 흘긴다. 지나온 과거는 알지 못하지만, 까칠한 손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녹록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따사로운 시선을 피해 시장 안 좁은 사거리, 빵냄새가 슬그머니 올라온다. 모퉁이에는 언제나 단냄새로 사람들을 홀리는 곳이 있다. 도이치 빵집, 간판에는 십자가 모양의 빵에 소보로와 붉은색 딸기잼이 잔뜩 묻어있는 사진이 걸려있다. 냄새와 함께 포개지는 맛의 강렬함 때문에 침을 몇 번이고 꿀떡 삼켜야 했다. 찐빵과 만두 냄새를 골고루 버무린 수증기와 맞서다 보면 저기 멀리서 서예학원이 보이기 시작한다. 서로의 욕망으로 가득한 이곳 전쟁터에서 유일한 아지트 같은 곳이다. 계단을 2칸씩 건너뛰며 2층 건물로 후다닥 뛰어올라갔다.
큰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기다린다. 구매와 식욕을 자극하는 소란스러움이 일제히 음소거된다.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을 열면 기분이 이와 같을까. 학원이름은 ‘깊네 서예학원’, 이름만큼이나 정적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다. 집착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조용함과 깔끔함을 강요하는 선생님 덕분이 아닐까. 주의가 아무리 산만해도 여기만 오면 조각상이 된다. 벌칙으로 수십 장에 달하는 붓글씨를 쓰다 보면 저도 모르게 신사임당 앞 한석봉처럼 숙연해지곤 했으니까.
오늘은 몇 번의 벌칙만으로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정말 이러다 한석봉이 될 것 같다며 신사임당에게 볼멘소리를 하고 나오던 참이다. 붓을 잡고 종이를 가르던 감각 때문인지 손은 아직도 얼얼하다. 수십 가지 유혹과 소란을 거치고 난 후의 통증이 싫지만은 않다. 차곡차곡 쌓아둔 고통은 실력으로 돌아온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럽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중이다. 이미 완연히 내려앉은 땅거미 덕분에 추위가 더욱 기승이다. 손끝에 남았던 옅은 먹향은 시장의 기름진 냄새에 금세 덮여버렸지만, 그 정적 속에 한 자씩 한 자씩 써 내려가던 붓글씨의 감각만은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양 옆으로 늘어선 분주한 거리에는 노란색 백열등이 주렁주렁 널려있다. 시장을 알알이 수놓던 모습에 잠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본다. 점퍼 주머니에 푹 찔러둔 손만큼이나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1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시장통 같은 직장 생활을 버텨왔다. 나는 다시 그 낡은 철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매일같이 성과의 유혹에 시달리고, 타인의 시선에 매달리며, 단내 풍기는 유혹 앞에 비굴해져야 했던 소란스러운 날들. 다시금 활자 앞에 마음을 비우는 중이다. 그때만큼이나 자음과 모음의 생김새에 사활을 걸지 않지만 정성을 다한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비로소 나만의 정적이 깊어지길 바라면서.